추석 명절 여야 지도부의 방미 외유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입니다. 명절에 정치인들은 으레 민심을 듣는다고 명절 인사를 다니는 행사를 하지요. 코로나19로 명절 분위기가 예전처럼 흥성거리지 않고 이동이 많이 줄었으나,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대선 후보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서울역에서 귀성객들에게 명절 인사를 드리고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등의 행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올 추석 연휴의 이례적인 풍경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여야 지도부가 대거 미국을 방문한다는 점입니다. 문 대통령은 유엔총회 참석차 19일부터 23일까지 방미하는데요. 유엔총회가 열리는 뉴욕을 방문한 뒤 하와이로 이동했다가 귀국합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일행은 19일부터 24일까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일행은 22일부터 27일까지 각각 미국을 방문합니다.

명절은 위정자들에게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민생 현안을 파악하고 민심을 경청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추석 때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가 앞다퉈 미국 방문에 나선 것은 민심과 동떨어진 행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외교도 필요하고, 민생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외국을 방문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국민의 눈에는 외유(外遊, 외국에 나가 여행함)로밖에 안 보입니다. 나는 지난주 칼럼에서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는데요. 거듭하여 다시 그 질문이 새삼스럽습니다.

대학생들은 다음 정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 부동산 문제 해결을 꼽았습니다. 지난 8일 전국대학생학생회네트워크가 전국 대학생 244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7월 6일부터 16일까지 조사) 결과인데요. 조사 결과를 보면, 대학생 46.8%(복수응답 가능)가 부동산 문제 해결을 꼽았습니다. 취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응답(43.5%)보다도 더 높았습니다. 대학생들도 집값 폭등에 따른 주거 불안 해결이 취업 문제보다 더 시급하다고 느낀다는 얘기지요.

한겨레신문이 올해 1월 1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합니다. 한겨레 조사에 따르면, 양극화가 가장 심각한 분야로 부동산 등 자산 격차(42.7%)가 압도적 1위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라는 대답은 10.1%에 그쳤어요. 같은 내용으로 전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013년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23.6%)가 1위였고, 2017년 3월에는 부동산이 22.0%로 1위였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17.3%),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17.3%)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2021년 들어서 부동산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 이유는 문재인 정부 4년 동안 집값이 폭등했기 때문입니다. KB부동산 기준 지난 7월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 가격은 11억5751만원으로, 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평균 가격인 6억1755만원에서 5억3996만원(87.4%)이나 올랐습니다. 정부는 26번의 부동산 대책을 내놨지만 집값은 폭등했고 전·월세난이 극심해졌지요.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조사에서 부정 평가자들이 가장 많이 꼽은 실정도 부동산 정책이었습니다. 다 죽어가던 국민의힘이 기사회생하고 지난 4·7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것도 부동산 정책 실패의 역풍이었습니다.

‘집값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이고, 민심의 절박한 요구입니다. 부동산 가격의 안정이 차기 대선의 향배를 결정하는 데서도 중요한 변수로 될 전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 위정자들이 민의를 대변하고 민심에 부합하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집값 안정에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백 번 양보하여 만일 여야 정치인들이 굳이 추석 명절에 외국 방문을 가야 한다면 미국이 아니라 독일을 방문했으면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랬더라면 ‘외유’라는 의심은 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는 26일 독일 베를린시에서 투표가 실시됩니다. 주택 3000채 이상을 보유한 민간 부동산회사의 보유주택을 몰수해 사회화하는 결의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인데요. 이 주민투표는 ‘도이체 보넨 등 몰수’라는 시민단체가 발의했습니다. 도이체 보넨은 독일에 15만 5000여 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11만여 채가 베를린에 있고, 도이체 보넨을 비롯한 10여 개 부동산 대기업이 보유 중인 24만여 채가 몰수 대상입니다.

베를린은 190만 가구 중 150만 가구가 임대로 사는 세입자의 도시입니다. 베를린은 저렴한 월세와 안정된 치안으로 한때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명성이 있었지만, 임대료 폭등으로 이젠 옛말이 됐습니다. 최근 현지 언론사 여론조사 결과 주택 몰수가 ‘좋다’고 응답한 유권자는 47%, ‘나쁘다’고 응답한 유권자는 43%였습니다. 9월 26일 베를린의 주민투표 결과가 주목됩니다.

독일의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는 이미 임대료 안정을 위한 사회적 주택 관련 입법이 이뤄졌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은 시민 62%가 사회적 주택에 살고 있는데, 빈에서는 앞으로 민간이 짓는 주택도 3분의 2는 공적 관리 대상이 되도록 엄격한 건축법을 도입했습니다. 스위스의 취리히는 90% 이상이 세입자인데, 지난 15년 동안 임대료가 65% 올랐어요. 그러자 취리히는 주민투표를 통해 30%를 사회적 주택으로 바꾸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아마 서울의 아파트값처럼 4년 동안 87.4%가 올랐다고 한다면, 민간 임대주택 몰수를 위한 입법이 되고도 남지 않았을까요?)

이런 사례들을 소개하는 것은 유럽 나라의 주택 정책을 부러워하거나 모방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민생 구제의 집값 안정을 위한 부동산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근본적 전환과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입니다. 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의 실패한 부동산 정책을 재탕 삼탕 해봐야 정부 정책의 신뢰성만 떨어뜨리고 민심의 분노만 부추길 뿐입니다. 위정자들이 외국 방문을 통해 보고 배우더라도 우리나라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 참고할 만한 좋은 제도를 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미국만 우러러 쳐다보고 미국 방문을 마치 최고의 영광인 양 여기는 데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친미 사대에서 두 당은 한통속이고, 민심과 동떨어진 외유 행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에 위정자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추석에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가 앞다퉈 미국 방문에 나선 것은 마뜩잖고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2021년 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