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의 가면을 벗다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가 지난달 30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국가장으로 진행됐다. 국가장은 국가장법에 따라 국가가 주관하는 장례이다. 국가장법은 제1조에서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한 경우에 그 장례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집행함으로써 국민 통합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태우가 국민적 추앙을 받는 사람인가? 노태우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것이 국민 통합에 이바지하는가? 문재인 정부는 그렇다고 답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지난달 27일 국무회의에서 “고인께서는 제1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국가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서 “정부는 이번 장례를 국가장으로 해 국민들과 함께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예우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먼저, 정부의 국가장 결정이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대는 핑계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여당 일각에서는 내란죄를 범한 전직 대통령의 국가장 예우를 박탈하는 규정이 없다는 둥, 국가장법에 대한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둥 법 탓을 해댄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국가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국가장의 결정은 유족 등의 의견, 행정안전부 장관의 제청, 국무회의의 심의, 대통령의 최종 결정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국가장의 최종 결정은 대통령의 권한이다. 그러므로 노태우의 국가장은 정확히 말하면 문 대통령의 결정이다. 문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김부겸 국무총리가 국가장 장례위원장을,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이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노태우의 국가장을 집행한 것은 ‘민주’ 정부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 민낯의 본색이 드러난 일대 사건이다. 노태우는 군사반란을 일으킨 혐의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던 자다. 군사반란과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가. 군사반란의 주모자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는가.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집단학살한 살인마를 예우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란 말인가.
노태우에게 국가장은 가당찮은 예우다. 1997년 4월 김영삼 정부 당시의 대법원은 “우리나라의 헌법질서에서 헌법이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며 노태우에게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 원을 확정했다. 이런 자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것은 헌정파괴와 국민학살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노태우는 우리 헌정사상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첫 대통령이다. 그가 1995년 11월 처음 구속돼 기소된 것은 ‘비자금 사건’이었다. 그는 비자금 폭로로 막다른 궁지에 몰리자,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재임 기간에 통치자금이 필요해 기업의 성금으로 5000억 원 정도를 모았고, 1700억 원가량이 남아 있다”고 실토했다. 그해 11월 검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를 적용해 노태우를 구속 기소했다.
노태우의 비자금 뇌물 비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태우는 2011년에 출판한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에서 민자당 후보인 김영삼 총재에게 3000억 원을 건넸다고 기술했다. 그가 1995년에 실토한 이른바 재임 기간 통치자금과 퇴임 후 남은 비자금뿐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건넨 대선 자금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걸 전부 합치면 노태우가 조성한 비자금 총액은 조 단위에 육박하는 규모다.
새삼스레 노태우의 비자금 액수를 꺼내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뇌물 액수와 비교해보기 위해서다. 대법원 선고로 확정된 박근혜의 뇌물은 158억 8081만 원이다. 박근혜의 뇌물은 노태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된다. 노태우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25년의 소비자물가지수 변동에 따른 화폐 가치 계산으로 환산해 비교하면 수백 배 차이가 날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박근혜를 동정하거나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박근혜는 탄핵을 당했고 22년형을 선고받았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보다 수백 배나 더 많은 뇌물을 받은 죄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한 노태우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법의 적용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엿장수 맘대로란 말인가.
저지른 범죄의 경중으로 따지면, 뇌물죄뿐 아니라 헌정파괴의 죄질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압살한 박근혜의 국정농단 악행은 끔찍하고 처참했다. 그런데 노태우는 내란을 실행에 옮겨서 총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민을 학살한 자다. 이런 자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박근혜를 감옥에 가둬두고 처벌할 명분이 있는가. 문재인 정부의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노태우에 대한 면죄부는 전두환에 대한 면죄부와 다를 게 없다. 노태우와 전두환은 둘 다 박정희의 양아들이자 같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던 한패이다. 둘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해 먹었고 퇴임 후 같이 구속·기소돼 내란죄로 처벌받았다. 정부의 노태우 국가장 결정에 대한 반대가 거세자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은 지난달 28일 “노태우와 전두환은 다르다”고 강변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억지 궤변에 불과하다.
국민의힘 대선예비후보인 윤석열 전 총장이 지난달 19일 부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너절한 소리를 해댔다. 윤 후보가 실수로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독재 찬양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은 ‘전두환 찬양 망언자’를 규탄한다는 현수막으로 전국의 거리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독재 찬양에 대한 규탄은 정당하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의 규탄은 진정성이 없다는 게 금방 탄로 났다. 노태우의 국가장 결정·집행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이중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이런 현상이 왜 나타나는 것일까. 진정성이 아니라 철저히 선거공학에 따르기 때문이다. 전두환 찬양 규탄도, 노태우 국가장 결정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철저히 대선 득표를 위한 선거공학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민주의 가면을 쓰고 민주를 참칭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참칭’이란 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이른다는 뜻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도 노태우의 국가장에 동조하고 있다. 이 후보는 노태우의 빈소를 조문하면서 “빛의 크기가 그늘을 덮지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다한 점을 평가”한다는 구차한 조문의 변을 늘어놓았다.
브라질의 교육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9.21.~1997.5.2.)는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갈등에서 손을 떼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힘있는 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고 말했다. 학살자와 피살자의 갈등에서 중립인 척 가장하면서 애매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학살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노태우의 국가장에서 민주의 가면을 벗었다. (2021년 11월 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