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영입 쇼와 위기 불감증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선거 때마다 연출되는 낯익은 쇼가 있다. 각 당에서 외부 인사 영입이랍시고 벌이는 식상한 쇼다. 석 달 앞으로 다가온 20대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들은 외부 인사 끌어들이기에 나섰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거대 양당이 스타 예능 피디를 영입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양당이 아예 대놓고 ‘정치의 예능화’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MBC 콘텐츠총괄부사장을 지낸 김영희 전 피디를 영입하여 대선 선거대책위원회 홍보소통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김 전 피디는 ‘이경규의 몰래카메라’, ‘느낌표’, ‘나는 가수다’ 등을 연출했으며, 일명 ‘쌀집 아저씨’로 불린 예능계의 스타 피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측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 전 피디 영입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었는데, 그가 들어간 곳은 이재명 캠프였다.
김 전 피디는 국민의힘에서 영입을 타진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쪽(국민의힘)과도 한 수개월 전부터 만나서 긍정적으로 협의를 했던 건 사실”이었다면서 “피디를 그만두고 이쪽(정치권)에 가도 되는 건가 고민을 했고, 좀 시간을 달라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으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후보나 당은 사실 두 번째 판단 기준”이고 “가서 일을 했을 때 나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쪽이 어느 쪽인가를 생각해서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예능 출연과 정치의 예능화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2009년 <무릎팍도사>(MBC)에 출연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SBS)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2017년 대선 당시에는 이재명 후보가 <동상이몽>(SBS)에 출연해 평범하고 가정적인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며 호감도를 높였고, 안희정 후보는 <말하는 대로>(JTBC)에 출연해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었다. 최근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는 한 방송사의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다가 촬영 직전에 일방적으로 취소 통보를 받았다면서, “이런 부당한 처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SNS를 통해 항변하기도 했다.
정치의 예능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이런 현상이 더욱 도드라진다. 정치인들이 토론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현안과 정책에 대하여 치열하게 논쟁하기보다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친근하고 호감 가는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게 작금의 정치 세태다. 자기만의 특색 있는 정책과 차별화된 대안을 제시하면서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는 정치 본연의 임무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가수는 노래하고 배우는 연기하는 것이 본업인데, 본업은 뒷전인 채 관찰 예능으로 인기 관리하는 연예인과 다를 게 없다.
급기야 거대 양당의 대선 캠프에서 예능 피디를 서로 영입하겠다고 경쟁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책은 실종되고 예능만 남은 선거로 전락한다면 정치는 이제 갈 데까지 간 막장이나 다름없다. 하긴 누가 대신 써준 원고가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후보는 대본이 없으면 연기를 하지 못하는 배우와 다를 게 없다. 그러니 후보를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연출하려면 유능한 피디의 솜씨를 빌리는 수밖에 없을 터다.
어디 그뿐인가. 이재명 후보 선대위는 1일 김윤이 뉴로어소시에이츠 대표를 MZ 세대 전문가로 영입했다고 밝혔다. 이 후보 선대위는 김 씨를 데이터 전문가로, 뉴로어소시에이츠를 데이터 전문기업으로 홍보했다. 그러자 국민의힘 측에서는 “김 씨가 전날 오후까지만 해도 국민의힘 의원을 찾아가 윤석열 후보 선대위에 추천해달라고 했다”면서 황당하다는 논평을 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경쟁적으로 벌이는 인재 영입 쇼가 삼류 드라마보다 더 천박하다. 도대체 양당이 영입하는 ‘인재’의 판단 기준이 뭔가.
더불어민주당이 인재 영입 1호로 야심 차게 인선했던 조동연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은 사생활 논란 끝에 낙마했고, 국민의힘도 역시 인재 영입을 둘러싼 후폭풍을 겪고 있다. 의사 함익병 씨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한다고 발표했다가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되자 전격 철회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으나 당내 갈등이 불거지고 사퇴를 요구하는 서명 운동과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판이다. 도대체 뭐 하는 짓들인가.
선거 때마다 의례 벌어지는 인재 영입 놀음은 한국 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정치 후진국에서도 선거 때 외부 인사 영입 같은 쇼는 안 한다. 낯부끄러운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그런데도 거대 양당은 이번에도 이런 식상해 빠진 인재 영입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유권자의 관심을 끌기는커녕 오히려 세간의 비웃음만 살 뿐인데도 이런 구태를 반복하는 걸 보면, 한국 정치가 얼마나 후진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이 나라의 5년을 이끌어갈 행정부의 수반을 뽑는 20대 대선이 이렇게 퇴행적으로 전개되는 건 우리 국민에게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지금 우리는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서 푼어치도 안 되는 값싼 희극에 한눈팔 새가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 2단계 전환은 유보되었으며, 6일부터 4주간 특별방역 대책이 시행된다. 이 기간이 지난다고 해서 다시 방역수칙이 완화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민생의 위기가 파국으로 내몰리고 있는 가운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경제위기의 징후까지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6%, 유럽은 4%를 넘기면서 세계 경제에 인플레의 공포가 덮치고 있다. 거의 30년 만의 일이다. 미국 연방은행과 유럽중앙은행은 애초 인플레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5일 통계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전년 동기 대비 3분기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6%를 기록했다. 분기 기준으로 2012년 1분기(3.0%) 이후 거의 10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특히 지난 3분기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0% 올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지난달에는 전년 대비 6.1%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지난달 생산자 물가는 8.9%, 수입 물가는 35.8%나 올라 심각한 인플레를 예고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뿌려진 막대한 유동성이 미처 회수되기도 전에 코로나가 발발함으로써 세계 각국은 또다시 더 막대한 돈을 뿌리는 악순환에 빠졌다. 자산가격 폭등과 인플레의 후유증은 예고된 것이었다. 인플레는 서민들에게 코로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지옥일 수 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 인상과 유동성 회수가 불가피한데, 그러면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 전반에 심각한 위기가 불어닥칠 수 있다. 초저금리 기조에 사상 최대로 불어난 가계 부채는 시한폭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끝나지 않은 코로나와의 전쟁도 힘겨운데,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상 초유의 거대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 정작 지금 우리 정치권은 어떤가. 대권 경쟁에 눈이 멀어 위기 따윈 안중에도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일말의 위기의식조차 없으며, 집권당으로서의 책임감도 잊은 지 오래다. 심지어 지난주에 홍남기 부총리는 아들의 서울대병원 ‘특혜 입원’으로 국민의 염장을 질렀다. 국민의힘은 당내 자리다툼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다가 지지율이 떨어지자 ‘극적 봉합’의 생쇼를 연출하였다. 위기는 남의 일인 양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권교체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정권교체란 말인가. (2021년 12월 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