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칙 판결과 권력 구조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대법원은 지난 16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심에선 원고인 노동자 측이 승소했으나, 2심 항소심에선 패소했었다. 소송이 제기된 지 9년, 2016년 대법원에 사건이 접수된 이후 5년 만에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소송이 노동자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인데도 회사 측에서 이를 제외하고 법정수당과 퇴직금을 지급했다며 수당의 차액을 달라고 소송을 냈다. 회사 측은 임금협상 당시 상여금 등은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이것을 소급 반영해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이번 소송에서 쟁점은 신의칙의 위반 여부였다. 신의칙은 민법 2조1항에 명시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1심에선 신의칙 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했으나, 2심에선 신의칙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16일 판결에서 “추가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판단할 때는 추가 수당의 규모와 실질임금 인상률 등을 고려해야 한다. 기업이 일시적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를 예견할 수 있었고 극복할 수 있다면 신의칙을 이유로 근로자의 수당 청구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노동자가 추가로 청구하는 임금을 지급할 경우 기업 경영상에 어려움이 발생한다면서 신의칙 위반이라고 배척해왔던 기업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에도 기아자동차, 두산모트롤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대법원은 “기업을 경영하는 주체는 사용자이고 기업의 경영상황은 기업 내·외부의 여러 경제적·사회적 사정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다”며 “통상임금 재산정에 따른 노동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기업 경영에 따른 위험을 사실상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이란 생소한 법리를 끌어들여 기업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은 2013년 12월 양승태 대법원이었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고정적·일률적·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하면서도, 기업이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는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례를 남겼다. 양승태 사법부는 미지급 임금이라도 회사가 어려우면 안 줘도 된다는 황당한 궤변으로 기업에게 면죄부를 안겨줬던 것이다.
이 판결이 나올 당시에도 이상훈·이인복·김신 대법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이들은 “강행규정으로 보장된 근로자의 기본적 권리를 신의칙 적용으로 제약하려는 것은 헌법적 가치나 근로기준법 강행규정성(강제적으로 적용되는 규정)에 정면으로 반한다”과 밝혔다. 소수의견은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의칙으로 그 강행규정성을 배척하는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들고, 거듭 살펴봐도 그 논리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특히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의 개념이 모호하다고 비판했는데, “도대체 추가 부담액이 어느 정도가 돼야 그러한(중대한 경영상 어려움) 요건을 충족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근로기준법은 모든 노동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돼야 하는 강제규정이다. 그런데, 회사의 경영상황에 따라 사정이 좋은 기업은 통상임금을 지급하고 형편이 어려운 기업은 안 줘도 된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신의칙을 이유로 근로기준법을 부정하게 되면 노동자의 권리는 사업장이나 개별 소송마다 ‘복불복’이 되고 말 것이다. 세계 법조계를 살펴봐도 신의칙을 이유로 강행규정성을 배척할 수 없다는 것이 대륙계는 물론 영미계 민법학의 대세로 굳어져 있다.
그런데도 이런 시대착오적인 황당한 판례가 나왔던 배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통상임금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은 한국지엠(GM) 때문이었다. 2013년 2월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5월 첫 외국 순방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방미 일정 중에 대니얼 애커슨 지엠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통상임금 문제를 꼭 풀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한국지엠노조는 통상임금 반환 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모두 승소했고 대법원 판결만 남겨놓고 있었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면 한국지엠은 8천억 원대 체불임금을 토해내야 할 판이었다.
박근혜의 통상임금 발언이 나온 뒤 양승태 대법원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갑을오토텍의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 여부, 그리고 노사가 상여금을 통상임금 산정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음에도 노동자가 합의 무효를 주장하며 추가 임금을 청구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하는지 여부였다. 1심에선 원고가 패소했고 2심에선 원고가 승소했는데, 2013년 12월 대법원은 신의칙을 이유로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박근혜의 탄핵 이후 폭로되었듯이, 청와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양승태 사법부의 민낯은 처참했다. 갑을오토텍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 하루 뒤 작성된 ‘통상임금 판결 선고 후 각계 동향 파악’이란 제목의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민정라인을 통하여 판결의 취지가 잘 보고·전달” “재판과정에서 대법원이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최대한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봄” “판결 선고 결과에서도 대법원이 정부와 재계의 고민을 잘 헤아리고 이를 십분 고려해준 것으로 받아들임” 등의 청와대 반응이 적혀 있었다. 청와대의 심기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대법원, 권력의 시녀로 타락한 사법부의 일그러진 초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갑을오토텍 판례를 근거로 2014년 5월 한국지엠의 통상임금 사건도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되었다. 노동자가 승소했던 1·2심 판결이 뒤집힌 것이다. 애커슨 지엠 회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기했던 소원 수리가 1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마땅히 한국지엠 노동자에게 돌려줘야 할 미지급 임금은 고스란히 지엠 자본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렸다.
주목할 점은, 한국지엠의 통상임금 소송 과정에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구조가 명확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지엠 자본-청와대-사법부로 이어진 권력 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에서 보았듯이 사법부는 한낱 청와대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경제 권력(지엠 자본)과 정치 권력(청와대)의 관계는 경제 권력이 우위를 차지하는 갑을관계이다. 경제 권력을 장악하고 대대로 세습까지 하는 자본에 비하면 청와대의 대통령은 겨우 5년 단임 계약직으로 쓰다가 버려지는 신세일 따름이다.
‘청와대 정부’ 또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를 정치 권력 우위의 구조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장기 독재정권의 경험에서 비롯된 착시효과일 뿐이다. 1987년 이후 들어선 단임제 정부가 피할 수 없었던 임기 후반기의 레임덕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임기를 마친 뒤 전직 대통령들의 말로가 어떠했는가를 보면 정치 권력의 위상이 명확하지 않은가. 21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전직 대통령들과 다를 게 없다. (2021년 12월 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