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불평등 보고서와 부유세 논의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세계 최고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졌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 탓에 숨졌다고 영국 자선재단 옥스팜이 밝혔다. 옥스팜은 17일(현지시각) 낸 세계 불평등에 관한 연례 보고서(‘불평등이 죽음을 부른다’)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3월부터 작년 11월까지 세계 10대 부자들은 재산이 2배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반면, 빈곤층은 매일 2만1천 명씩 숨졌다.
옥스팜이 경제잡지 <포브스>의 수치를 인용해 계산한 결과,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 등 세계 10대 부자의 전체 재산은 지난 2020년 3월의 7천억 달러에서 2021년 11월의 1조5천억 달러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이 기간 이들의 자산은 하루 13억 달러씩 증가했으며, 이는 코로나19 발발 이전 14년간의 자산 증식 규모보다 많았다.
이는 팬데믹 기간 세계 인구 99%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1억6000만 명 이상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현실과 대비된다. 팬데믹 기간 동안 기아, 폭력, 기후변화, 보건 시설 부족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4초마다 1명씩 사망했다고 옥스팜은 세계은행의 자료를 근거로 추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1억6천만 명이 하루 5.5달러(약 6540원) 이하로 살아갔다. 세계은행은 상위 중소득 국가에서 하루 5.5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사람을 빈곤층으로 규정한다.
옥스팜은 지난해 초 ‘불평등 바이러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의 전례 없는 지원으로 전염병이 시작된 지 9개월 만에 상위 1000명의 억만장자들은 잃어버린 부를 모두 회복했을 뿐 아니라 총자산이 3.4조 달러나 증가하기도 했다. 참고로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엔 억만장자들이 자산을 위기 이전으로 돌리는 데 5년이 걸렸었다.
옥스팜은 전 세계 상위 부자 2000여명이 가진 돈이 전 세계 60% 인구가 가진 돈보다 많다고 밝혔다. 지난해 기준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수퍼 리치’는 세계에 2153명이었고, 이들이 보유한 재산 총액은 약 8조7000억 달러로, 46억 명의 재산 총액보다 5000억 달러 많았다. 이 기구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결과로 ▶️전 세계 2153명의 억만장자들이 46억명보다 많은 부를 갖고 있고 ▶️22명의 부호들이 아프리카 모든 여성보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전 세계 상위 1% 부호들이 69억 명보다 2배 이상 많은 부를 갖고 있고 ▶️억만장자의 수는 지난 10년간 두 배로 증가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 사태로 약자들의 고통은 커졌지만 부자는 오히려 더 늘어났다. 지난해 11월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21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인 한국의 부자는 39만3000명으로 추정됐다. 2019년보다 10.9% 늘었다. 이들이 보유한 총 금융자산은 2618조 원으로 1년 사이 21.6%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자의 자산 중 부동산과 금융자산 비율은 약 6대 4 수준이었다. 일반 가구(8대 2)보다 금융자산 비중이 두 배 많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1억 원 이상인 수입차가 6만5천148대 팔려 전년보다 50.9%나 늘었다.
전 세계의 백만장자 102명이 참여하고 있는 한 단체가 18일 공개서한을 통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라고 촉구했다. ‘애국적인 백만장자’라는 이름의 이 단체는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지난 2년 동안에도 자신들의 재산은 증가했지만, 세금을 공정하게 내고 있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세계경제포럼이 신종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지난 17일부터 스위스 다보스에서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다보스 포럼에 참여한 주요국 정상들과 국제기구 지도자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이같이 밝혔다.
국제 사회운동단체 불평등투쟁동맹,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소(IPS), 옥스팜, 애국적 백만장자는 19일 공동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부유세를 연간 2조5천200억 달러 거두면 23억 명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전 세계에 충분한 백신을 만드는 것은 물론 빈곤층에 의료·사회보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5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백만장자에게는 연간 2%, 5000만 달러 이상 자산에 3%, 10억 달러 이상 자산에 5%의 부유세를 도입할 경우 연간 2조5200억 달러 이상의 재원이 마련될 수 있다. 세계 최고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하면 23억 명의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전 세계에 충분한 백신을 보급하며, 저소득 및 중하위 소득 국가(36억 명)의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인 의료 및 사회적 보호를 제공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는 순자산 500만 달러(60억 원) 이상인 개인이 7만2천640명 있다. 이들의 총 순자산은 1조3천500억 달러(1천611조 원)로, 연간 358억 달러(42조7천억 원)의 부유세를 걷을 수 있다. 이는 올해 보건복지부 예산의 44%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불평등이 세계적인 화두이고 부유세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때에, 대한민국 정치권은 완전히 딴 세상이다. 20대 대선이 두 달도 남지 않았고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들은 부동산 개발 공약 경쟁을 벌이느라고 여념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에 대한 성난 민심을 달래면서 표를 얻기 위한 공약 경쟁일 터다. 그런데 후보들의 공약은 하나같이 부동산 규제를 풀고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며 공약에 차별성도 없다. 실현 가능성도 의문이지만 모처럼 잡혀가는 집값 안정 기조를 흔드는 무책임한 공약 남발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23일 발표한 주택 공급대책을 통해 정부의 기존 206만 호 공급 계획보다 105만 가구 더 많은 311만 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에만 107만 호를 공급하겠다면서 “공급과잉이라는 말이 나오더라도 대량공급 약속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앞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지난 16일 ‘다시 짓는 서울’ 공약을 발표했다. 이 후보는 ‘반값 아파트’, 윤 후보는 ‘원가 아파트’ 등 비슷한 이름을 붙여 인근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공약도 제시하고 있다.
정부가 2025년까지 서울에 추가 공급하기로 한 주택은 59만 가구이다. 그런데 여야 대선 후보들은 각각 2배 가까운 물량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0년간 주택 공급량이 50만 호 수준이다. 공약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도권 개발은 국토균형발전 취지에도 어긋난다. 난개발에 대한 우려를 무시한 채 실현 가능성도 의심스러운 공약을 경쟁적으로 남발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무책임의 극치는 재원 조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 많은 물량의 주택 공급을 무슨 돈으로 한다는 말인가. 주택 건설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어느 후보도 말하지 않는다. 정부의 재원은 세금이다. 세금을 어디에서 어떻게 걷겠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어디에다 어떻게 퍼붓겠다는 공약만 남발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겠다는 대선후보라면 예산을 어디에다 어떻게 쓰겠다고 공약하기 전에 세금을 어디에서 어떻게 걷겠다고 말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2022년 1월 2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