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의제가 실종된 대선이지만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20대 대선은 노동 의제가 실종된 선거로 기록될 것 같다. 투표일이 보름 남짓 앞으로 다가왔으나 노동 의제는 관심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 있다. 5년 전 19대 대선에서는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이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였으며,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해소’가 주요 후보들의 공약으로 등장했었다. 최저임금 1만 원 달성 시기를 두고 대선 후보들의 의견이 갈렸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해소에 대해선 후보들의 정책이 제각각이었지만, 어쨌든 노동 의제가 선거에서 주요 쟁점이었다. 하지만 20대 대선은 2017년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반노동’ 또는 ‘비노동’의 대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공약과 실행은 별개 문제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뒤 3년 안에(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던 공약은 취임 1년 만에 공수표가 되었다. 문 대통령이 당선 직후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를 설치했지만 공공부문 81만 개, 민간부문 50만 개 일자리 창출사업은 흐지부지되었다. 보육, 요양, 사회복지, 공공의료 일자리 34만 개를 만들겠다던 사회서비스공단 공약은 하나 마나 한 수준에서 시늉만 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은 자리에서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라고 공언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적극 해결하겠다는 선언적인 의미의 발언이었고, 기대가 컸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 지난해 10월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사상 처음으로 800만을 돌파했고 임금은 정규직의 53% 수준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비정규직 비중은 회원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1, 2위를 다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은 비정규직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플랫폼 사업체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일거리를 배분하고 노동자를 관리하며 노동조건을 결정하면서도 사용자의 책임과 의무는 회피한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플랫폼 노동자가 노조설립필증을 받아와도 플랫폼 업체는 ‘우리는 사용자가 아니라 중개업자’라고 주장하면서 책임과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
스페인 정부는 지난해 5월, 디지털 플랫폼 부문에서 배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긴급입법으로 ‘라이더 법’을 제정했다. 2020년 8월에 스페인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를 통해 배달 플랫폼 기업 글로보의 배달 라이더가 노동자라고 만장일치로 판결했으며, 지난해 5월에도 플랫폼 딜리버루의 라이더 역시 노동자라고 판결한 바 있다. 판결의 후속 조치로 정부가 법 제정에 나선 것이다. 이로써 스페인은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처음으로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에 등록된 배달원의 지위를 법으로 명시한 나라가 됐다.
유럽연합은 디지털 플랫폼 경제가 빠르게 성장해 2800만 명이 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 2025년에는 4300만 명으로 그 수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역내 노동자 2800만 명 중 550만 명이 자영업자로 잘못 분류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차량 호출 서비스 우버나 배달서비스 딜리버루 등 플랫폼 업체들은 기사나 배달원이 자영업자라고 주장한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지난해 12월 노무 제공 플랫폼 기업을 노동법의 사용자(고용주)로 추정하는 입법지침 초안을 발표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법적으로 플랫폼 기업은 ‘사용자’, 종사자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자’에 해당한다. 집행위는 이번 지침에서 5가지 기준을 제시해, 이 중 2가지 이상의 기준을 충족할 경우 플랫폼 사업자를 ‘사용자’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집행위가 제시한 기준은 △플랫폼이 종사자의 보수 수준을 결정하는지 △업무 실적을 감독하는지 △노동시간 및 휴무의 자유를 제한하는지 △업무 시 복장 기준 등을 설정하는지 △제3자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하는지 등이다. 집행위는 또 플랫폼 종사자가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받을 경우 최저임금, 단체교섭권, 노동시간 규제, 산재로부터의 보호, 실업 및 병가 수당, 연금 등 노동권을 보장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입법지침은 플랫폼 노동이 노동자인지 자영업자인지에 대한 ‘입증 책임의 전환’을 제안하고 있다. 플랫폼 기업 측에서 종사자의 노동자 분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그들이 사용자가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노무 제공자가 소송을 통해 ‘노동자’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노동자임을 입증해야 했다면, ‘피고용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책임이 플랫폼 기업에게 있다고 명시한 것이다.
또한, 플랫폼 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에 대한 내용도 포함됐다. 플랫폼 기업들은 업무의 할당, 수행한 업무에 대한 감독과 평가, 인센티브 제공과 제재 등에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다. 이 알고리즘은 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결정하고 있음에도, 플랫폼 기업들은 이것이 영업기밀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입법지침은 플랫폼 노동자가 업무의 배분·보수 지급·인센티브 지급 등의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으며, 알고리즘에 따른 ‘자동화된 의사결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에 대해 ‘이의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다고 적시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의 입법지침 초안은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의 논의, 유럽 의회와 이사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수정되고 달라질 수 있다. 집행위의 입법지침 초안은 유럽 의회와 이사회를 거쳐서 확정되며 지침이 통과되면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은 2년 안에 이 지침에 맞도록 국내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스페인의 ‘라이더법’이 음식배달 플랫폼 노동자에만 적용되는 것과 달리 입법지침은 모든 플랫폼 노동자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가 플랫폼 노동자 보호를 위한 입법지침을 발표한 것은 그에 앞서 유럽 의회가 ‘라이더·운전기사 등 플랫폼 노동자를 위한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적 권리보장’을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따른 것이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플랫폼 노동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노동자성 판단에 관한 논쟁이 늘어나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법지침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르면, 배민커넥트나 쿠팡이츠 등 플랫폼 기업이나 대리운전 플랫폼 기업들 대부분이 ‘사용자’에 해당하며, 이 플랫폼 기업들에 노무를 제공하는 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플랫폼 종사자들의 노동자성을 둘러싼 논쟁이 전 세계적인 관심사인 가운데 유럽연합을 비롯하여 세계 주요국들이 플랫폼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플랫폼 종사자들이 우리나라에서도 급격히 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한 법과 제도는 전혀 없는 상태다. 수수료는 과다하고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플랫폼 종사자들의 노동권은 사각지대에 내팽개쳐진 상태나 마찬가지다.
사실상 정부의 플랫폼 종사자 법안인 더불어민주당 장철민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제출된 ‘플랫폼종사자법’은 플랫폼 기업 종사자들에게 노동자로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당 이수진 의원이 대표 발의한 ‘플랫폼종사자법’도 비슷하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노동정책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주 120시간 노동, 주 52시간 폐지, 최저임금제 폐지 등등 반노동 망언들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인구 약 2500만 명 가운데 2000만 명이 노동자이다. 노동 의제의 실종은 곧 인권의 실종이다. 노동 의제가 실종된 20대 대선이지만 노동자에게 강 건너 불구경일 순 없다. 더 나쁜 놈 막으려고 덜 나쁜 놈 찍었다가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싶다는 후회를 더 이상 반복해선 안 된다. ‘개악’을 찍고서 ‘개선’을 기대하는 것은 자가당착의 모순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악이 아닌 선에 투표해야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2022년 2월 2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