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의한 평화’라는 낡은 프레임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러시아가 24일(현지시간) 새벽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무력을 사용해 주권 국가의 영토를 침범해 전쟁을 벌이는 것은 명백한 침략 전쟁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강력히 규탄받아 마땅하다. 러시아의 야만적 침략 전쟁에 절대 반대하며, 푸틴 정부는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당장 철군해야 한다.

푸틴은 ‘서방과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공격과 괴롭힘을 당해 온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과 자치공화국들의 평화유지, 자유, 인권을 위해서 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더구나 평화유지를 위해서 침략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언어도단의 터무니없는 궤변에 불과하다.

국내 언론의 뉴스만 보면, 안보 위협을 핑계로 푸틴 개인의 야심과 강국 부활을 꿈꾸는 러시아의 팽창주의가 우크라이나 침략의 원인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 역시 이번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 해체 이후에 약속을 어기고 나토를 동쪽으로 확대하여 러시아를 포위하고 안보 위협을 가한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의 동진 정책을 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것은 1990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했던 약속을 깨뜨린 것이다. 당시 소련은 이 약속에 따라 독일이 통일 후 나토에 가입하는 것에 동의한 바 있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700km 떨어진 곳에 나토군이 배치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며,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이 나토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사정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안보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안보 우려를 거듭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은 나토를 확대하지 않으며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명시적 약속을 한사코 거부했다.

러시아의 안보 우려는 괜한 트집이나 엄살이 아니다. 군사력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압도하지만, 미국과 나토의 군사력은 러시아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미국의 국방비는 러시아의 12배가 넘는다. 나토 가맹국 중 영국, 독일, 프랑스의 국방비만 합쳐도 러시아의 3배에 가깝다. 러시아에게 핵무기가 있다지만,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도 핵무기 보유국이다. 또한, 러시아의 나토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미사일방어체계가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구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에게 치명적인 안보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1962년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했을 때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쿠바 미사일 위기’와 다를 게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공격이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침략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단호히 규탄받아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며 ‘전쟁을 멈추라!’는 목소리가 국제적으로 드높아지고 있다. 전 세계 주요 도시는 물론 러시아 내부에서도 각계각층이 반전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당국의 살벌한 위협에도 러시아의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등 34개 도시에서 반전 시위가 이어져 3천여 명이 체포됐다고 한다. 세계 시민들의 반전 투쟁은 날로 확산할 게 틀림없다. 푸틴 정부는 지금 당장 참혹한 전쟁을 멈춰야 한다.

동시에 러시아를 압박하고 위협하는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의 나토 확대 정책도 철회되어야 한다.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은 파병과 병력 증강, 무기 배치들을 중단해야 한다. 나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 체제에서 서방 국가들의 집단적 안전보장체제를 목적으로 설립된 군사동맹이다. 동구가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나토는 존립 목적이 상실되었으므로 벌써 해산했어야 마땅하다. 나토는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해산하는 것이 맞다.

세력 팽창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양측 모두에게 우크라이나는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며 우크라이나 국민은 전쟁의 희생양일 뿐이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이래로 일부 동남부 지역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과 내전이 진행 중이고 이 내전으로 이미 1만4천 명이 사망했으며 3백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전면적인 침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얼마나 끔찍한 참상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두렵다. 전쟁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영토주권이 보장되고 자결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을 당하고 미국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들이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한반도 상황도 안심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위기감을 부추기기도 한다. 국민의힘과 친미세력들은 마치 때를 만났다는 듯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아니라 전쟁을 대비해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군사동맹에 참가하고, 전술핵과 사드도 추가 배치해야 하며, 북에 대한 선제타격도 불사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일등신문’이라고 자랑하는 국내 한 일간지는 <우크라 보고도 “평화” 타령, 침공당하면 ‘종전선언’ 종이 흔들 텐가>라는 사설을 통해 참주 선동을 서슴지 않았다. “전쟁은 평화를 외치는 자에게 먼저 찾아온다. 평화는 힘으로 대비하는 사람들에게 깃든다”면서 “이 정권의 ‘전쟁이냐, 평화냐’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으니 양보하자’는 것이다. 양보 다음엔 굴복이고, 굴복 다음엔 우크라이나 처지다”라고 선동했다. 케케묵은 ‘힘에 의한 평화’ 타령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가 반박에 나섰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27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브리핑에 없는 대통령 이야기-40회’를 통해, 청와대가 “평화를 뒷받침하는 강한 국방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의 국방력 강화 노력은 실질적 전력 증강을 의미하는 ‘방위력 개선비’ 증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박 수석은 “기재부가 발표한 방위력 개선비 증가율은 이명박 정부 5.8%, 박근혜 정부 4.6%, 문재인 정부 7.4%”라며 “보수 정부보다 진보 정부가 높고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들보다 압도적으로 높다”고 밝혔다.

박 수석은 ‘문재인 정부가 군사력 증강에 소홀했다’는 정치 공세를 반박하기 위한 목적에서 방위력 개선비 증가율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방위력 개선비 증가율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이전 정부들보다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 자랑할 일인가? 수구냉전 세력의 ‘힘에 의한 평화’라는 프레임에 말려들어 부끄러운 수치를 자랑인 양 내세우는 꼴이 우습지 않은가?

2022년 국방예산은 54조6,112억 원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 당시 연 40조 원이었던 국방예산은 매년 증액되어 55조 원으로 늘어났다. 올해 국방예산 가운데 방위력 개선비는 16조6,917억 원으로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북에 대한 선제공격과 보복 응징 등을 위한 한국형 3축 체계 구축 사업은 ‘핵·WMD 위협 대응 관련 사업’으로 이름만 변경되어 문재인 정부 내내 그대로 추진되었고, 내년 예산에도 반영되었다.

남측은 북측 국내총생산(GDP)의 1.5배에 달하는 금액을 국방비로 쓰고 있다. 국방비가 이미 북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고, (정부 말마따나) 세계 6위의 군사 대국인데, 왜 매년 국방비는 늘어나야 하는가? 군비 증강을 멈추지 않으면서 남북 간의 신뢰는 어떻게 쌓으며, 한반도 평화는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 군비 증강은 ‘단계적 군축’을 명시한 4·27 판문점 선언에 대한 정면 부정이다. 이전 정부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국방비를 늘리고도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조차 하지 못했다. 이게 어디 자랑할 일인가? (2022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