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비상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세계 경제에 인플레이션 비상이 걸렸다. 미국의 3월 중 소비자물가(CPI)가 전년 동월보다 8.5% 올랐다. 이는 1981년 12월 8.9% 상승 이후 41년 만에 최고 물가상승률이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 회원국인 유로존의 3월 소비자물가도 7.5% 올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2월 물가 상승률이 31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최근 통계를 보면, 38개 회원국의 2월 소비자물가가 한 해 전에 비해 평균 7.7%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한 1990년 12월 이후 31년 2개월 만에 최고치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선진국 가운데 물가 상승률이 5%를 넘는 국가의 비중이 60%에 달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최대라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신흥국은 선진국보다 물가가 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신흥국 절반 이상이 물가상승률 7%를 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원자재 가격 급등 여파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 충격이 가해지면서 올해 물가상승 압박이 커지는 가운데 에너지와 식량 불안의 유령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아구스틴 카스텐스 국제결제은행 총재는 “우리는 새로운 인플레이션 시대를 맞은 것 같다”면서 “높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요인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흥국들이 먼저 경제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아시아와 남미 신흥국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촉발한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로 번지고 있다. 파키스탄 의회는 지난 10일 임란 칸 총리의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물가 폭등과 외환 위기 등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파키스탄의 지난달 기준 연간 물가상승률은 12.7%였다. 파키스탄에서 총리가 의회의 불신임을 받아 물러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스리랑카는 코로나19에 따른 관광객 급감과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아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다. 스리랑카의 통화가치(미국 달러화 대비 루피화)는 최근 한 달 새 40% 가까이 급락했다. 스리랑카의 3월 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8.7%에 달하고, 특히 식품 물가는 30.2%나 치솟았다. 외환보유액도 급격히 줄어들어 스리랑카 중앙은행은 일시적인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수도 콜롬보 등지에서는 고타바야 라자팍스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남미도 인플레이션 몸살을 앓고 있다. 페루에서는 연료와 비료, 식품 가격 등이 급등하자 트럭 기사와 농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달 페루의 소비자물가는 연초 대비 6.8% 올랐다. 1998년 8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취임 9개월이 채 안 된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9개월 새 총리가 네 번이나 바뀌었고,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칠레도 30년 만에 가장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칠레의 3월 한 달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에 달했다. 1993년 이후 30년 만에 최고치다. 연간 물가 상승률은 9.4%로, 2008년 이후 최고치이며, 중앙은행의 목표치 2~4%를 크게 넘어섰다. 1986년생 밀레니얼 세대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은 칠레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취임 한 달 만에 지지율이 추락했다. ‘인플레이션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는 속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인플레이션은 낯선 경제 현상이다. 세계 경제가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 이후 장기간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가 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졌던 게 1973년과 1979년으로, 한 세대보다 훨씬 이전에 벌어졌던 일이다. 물가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은 이전에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는 무척 낯선 현상이다.

최근의 상황은 1970년대 경제 위기 당시와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공급 발 인플레이션(오일 쇼크와 우크라이나 사태), 통화 긴축(급격한 금리 인상 가능성), 지정학적 충돌(중동과 동유럽) 등이 1970년대 유가 파동 당시의 양상과 닮은꼴이다. 그래서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최근 1조 달러 이상 자산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 34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2%는 가장 큰 우려로 스태그플레이션을 꼽았다. 한 달 전 응답률(30%)의 두 배 이상이다.

우리나라의 3월 소비자물가도 지난해 같은 달보다 4.1% 상승했다. 물가가 4%대 상승률을 보인 것은 2011년 12월 이후 10년 3개월 만이다. 외식은 6.6% 올라 1998년 4월 이후 최대 폭의 상승률을 나타냈고, 석유류는 31.2%나 폭등했다. 한국은행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당분간 4%대를 유지하고 올해 연간 상승률도 한은의 기존 전망치(3.1%)를 크게 웃돌 것이라고 진단했다.

언뜻 보면 4.1% 물가상승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높지 않아 보인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 8.5%에 비하면 우리는 절반도 안 돼 괜찮아 보일 정도다. 하지만 체감 물가는 통계수치보다 훨씬 높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소비자물가지수의 작성 기준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의 구성을 보면, 주거비 42%, 운송비(자동차 연료비와 교통비) 15%, 음식료비 15%, 의료비 9%, 교육·통신비 7%, 문화생활비 6%, 의류비 3% 등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소비자물가지수의 구성은 사뭇 다르다. 주거비 17%, 음식료비 14%, 외식비 13%, 운송비(자동차 연료비와 교통비) 11%, 교육비 9%, 의료비 7%, 문화생활비 6%, 의료비 6%, 통신비 5% 등이다. 주거비 반영비율에서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다. 주거비(집값) 상승이 제대로 반영이 안 되니, 통계수치와 체감 물가 간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 비상이 걸리자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은 속속 긴축으로 방향을 틀고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있다. 14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1.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이날 금통위 회의는 한은 총재(금통위 의장) 없이 열렸다.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겸임한 1998년 이후 24년 만에 처음이다. 총재 공석 상태에서 금통위가 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은 물가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난달 3년 3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인상한 데 이어 연말까지 6회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한 점도 한국은행이 금리 인상을 단행한 이유 중 하나다. 미 연준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5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를 0.5%포인트 올릴 가능성이 커졌다. 연준이 긴축에 속도를 내면 외국 자본이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선제적으로 금리 인상을 한 것이다.

문제는 부채다.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의 뇌관이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1862조 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세계 1위이며, 최근 2년간 증가 속도도 가장 빠르다. 금리가 인상되면 부채에 대한 원리금 상환 부담이 높아진다. 가계의 소비 지출이 줄어들면 경기 침체에 악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금융위기로 번질 위험이 커진다.

올해 1분기(1~3월) 무역수지가 39억5천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분기 기준으로 무역수지 적자는 2008년 3분기(7~9월) 이후 13년 6개월 만이다. 수출은 증가세를 이어갔으나 수출이 수입 급증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지난달 원유 수입액은 작년 같은 달보다 84%, 가스는 164%, 석탄은 106% 늘어났다. 에너지 수입 가격 폭등이 무역적자의 원인이다. 에너지 등 필수 수입품의 수입 가격이 오르면 무역수지는 나빠지고, 수입 물가상승에 따른 국내 물가상승 압력도 커진다.

다음 달 10일 출범할 윤석열 정부가 맞닥뜨릴 가장 큰 도전은 인플레이션이다. 물가를 안정시키지 못하면 정권의 안정도 없다. 민생의 위기에 따른 민심의 이반과 민중의 저항은 필연이다. ‘인플레이션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고 하는데, 과연 차기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이길 수 있을까. (2022년 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