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고’(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와 ‘R의 공포’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한 달 전에 경기 침체(Recession)에 대한 우려의 칼럼을 쓴 바 있다. (장·단기 금리 역전과 ‘R의 공포’_4월 4일) 1978년 이후 장·단기 국채 금리의 역전이 6차례 발생했는데 예외 없이 경기 침체로 이어졌으며, 경제 전문가들은 장·단기 금리의 역전 현상을 경기 침체의 선행지표로 해석한다고 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2분기에, JP모건 등은 내년 1분기에 금리의 역전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으나 예상보다 빨라져 ‘R의 공포’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하였다. 빅스텝 금리 인상은 22년 만의 일이다. ‘닷컴 거품’을 해소하기 위해 2000년 5월 단행된 빅스텝은 한 번에 그쳤다. 그런데 파월 연준 의장은 앞으로 남은 다섯 번 회의에서 두 차례 정도 0.5%포인트 추가 인상, 나머지 회의에서도 0.25%포인트 인상을 단행할 것임을 시사했다. 예고대로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연초 제로(0~0.25%)였던 기준금리가 연말쯤 2.5~2.75%로 올라가게 된다. 올 1년간 기준금리를 2.5%포인트 인상한다면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1980년대 말 이후 처음이다.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에 급가속을 내겠다고 선언하자 글로벌 증시는 크게 하락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서둘러 인상하는 이유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서다. 지난 3월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8.5%를 기록해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가가 치솟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대한 통화량이 풀렸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연준이 양적완화로 퍼부은 돈은 약 3조7천억 달러(약 4400조 원)였다. 2017년 이후 완만한 양적축소를 시작하던 와중에 코로나19가 터졌다. 코로나 사태 이후 지난 2년간 연준이 푼 돈은 약 4조8000억 달러(약 6000조 원)에 달한다. 미국을 필두로 하여 각국이 경쟁적으로 양적완화를 시행하면서 쏟아부은 천문학적 규모의 통화량이 이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시장의 관심은 오는 11일 발표되는 4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에 쏠려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지난달보다 0.4%포인트 낮아진 전년 동월 대비 8.1% 상승을 예상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달 급등한 유가 및 곡물가의 영향으로 물가가 9% 선까지 넘어설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물가는 무섭게 뛰는데, 경제성장률과 무역적자에는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미국 1분기 성장률은 예상외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1.4%(연율)로 코로나 사태 초기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였다. 경제학자들은 두 분기 연속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 경기 침체라고 판단한다. 3월 미국 무역수지 적자는 사상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또한, 1분기 비농업 부문 노동생산성이 전 분기 대비 7.5%(연율) 하락, 75년 만에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미국 경제가 경기 침체를 피할 확률은 33%뿐”이라고 말했다. 나머지 2/3는 약한 침체와 심한 침체가 각각 33% 확률이라는 것이다.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은 지난달 언론 인터뷰에서 “현재의 높은 인플레이션과 낮은 실업률을 봤을 때 향후 24개월 안에 미국 경제가 침체에 접어들 확률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하자 다른 나라들도 연쇄적으로 금리를 따라 올리고 있다. 달러 유출을 막고 물가를 잡기 위한 조치다. 영국 중앙은행은 5일 기준금리를 연 1%로 0.25%포인트 올렸다. 2009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4일 남미 최대국가 브라질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1.75%에서 12.75%로 1%포인트 인상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도 기준금리를 0.5%포인트씩 올렸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달러 가치가 올라가면 환율이 상승하게 된다. 원·달러환율은 연초 1192원에서 지난 6일 1272.7원까지 치솟았다. 환율 상승은 원화 기준 상품 가격을 낮춰 수출 기업에는 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수입 상품 가격을 인상시켜 13년 6개월 만에 최고로 오른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자극하고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킬 수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수입 물가 상승률은 지난 3월 35%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수입 물가 상승은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미국 금리가 인상되고 달러 강세가 이어지면 달러가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미국 금리가 올라가면 한국에 투자했던 자금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면서 금리까지 높은 미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또한,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 원화로 표시된 한국 주식 등의 달러 기준 가치가 낮아지므로 한국 자산에 대한 투자 매력이 떨어지고, 투자 목적으로 유입되었던 달러 자금이 이탈할 우려가 발생한다. 이미 연초 이후 한국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10조 원 넘게 빠져나간 상황이다.
한국의 기준금리는 현재 연 1.5%다. 오는 26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0.25%포인트 인상을 하더라도 파월이 예고한 대로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릴 경우 7월이면 미국에 역전당하게 된다. 우리는 작년 8월부터 지난 4월까지 4차례 0.25%포인트씩 금리를 인상했으나 추가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이 연내 세 차례 이상 더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물가와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금리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금리 인상에 따른 부작용의 우려도 만만치 않다. 금리 인상이 경기 침체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고, 특히 금융부채의 뇌관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부채는 공식 집계로 지난해 말 기준 1862조1000억 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6.1%로, 세계 주요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가계부채가 국내총생산을 초과했다. 가계부채 비율과 증가속도 모두 세계 1위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17%가 적자 가구인 것으로 조사됐다. 적자 가구란 처분가능소득이 필수 소비지출(식료품비, 주거비, 교육비, 의료비, 교통비, 통신비 등)과 원리금 상환액에 못 미치는 가구를 말한다. 한국금융연구원(KIF)의 보고서 ‘가계재무 상태가 적자인 가구의 특징과 개선방향’에 따르면, 전체 2052만 가구의 17.2%인 354만 가구가 적자 가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추산한 결과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354만 적자 가구의 연평균 경상소득은 4천600만 원인데, 원리금 상환액은 4천500만 원, 필수 소비지출은 2천400만 원, 이자 외 비소비지출(조세, 연금, 사회보험료, 가구 간 이전, 비영리단체로 이전 등)은 900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원리금 상환액이 경상소득 대비 무려 99.3%로, 벌어들인 돈으로 금융부채 원리금 상환하는 데만 쓰기에도 빠듯한 실정이다.
한국은행은 가계부채의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금융안정 상황(2022년 3월)’을 보면 금융시스템 상황을 보여주는 금융불안지수(FSI)는 올해 2월 7.4로 주의단계 임계치(8)에 근접했다. 금융불안지수는 크게 3단계로, 0~8은 안정단계, 8보다 크면 주의단계, 22보다 크면 위기단계로 구분한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은 주의단계 6~8개월여 만에 발생했다.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가 인플레이션을 잡는 일이다. 이달에는 가스요금 등 공공요금도 인상된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소비자물가가 6%대를 기록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이미 외식물가는 두 달 연속 6.6% 상승했고 서민들의 생활에 영향이 큰 생활물가지수도 5.7% 올랐다.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면 어떤 정책을 내놔도 백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3고’와 ‘R의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잘 대처할 수 있을까? (2022년 5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