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과 유령군대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69주년이다. 1953년 7월 27일 한반도에서 포성을 멎게 한 것은 정전협정이다. 정전은 ‘교전 쌍방 간에 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뜻한다. 종전을 합의하기 전에 군대끼리 전쟁을 잠시 멈춘다는 협정이다.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전 협상이 시작됐으나 결렬됐고 단 한 차례 회담 뒤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아직 중지 상태이며 한반도는 현재 종전이 아니라 정전 상태에 있다.

전후 두 세대가 넘게 지났으나 전쟁도 평화도 아닌 비정상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3년 전쟁 끝에 69년째 정전이라는 세계사적으로도 지극히 예외적이고 기이한 현상이다. 정전으로 총성은 멈췄으되 종전이 아니므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한반도에서 해마다 전쟁연습훈련이 벌어지고 수시로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것도,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정전체제가 그 배경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언제든지 사건이 터질 수 있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특히 서해상은 남과 북의 경계선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전협정의 서명이 이뤄졌다.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문에는 서해 수역의 군사분계선에 대한 합의가 없다. 그래서 언제든 충돌의 위험이 있는 곳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직전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려고 꺼낸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역시 그 배경에 정전체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육상에 그어진 군사분계선(휴전선의 공식명칭)은 정전협정에 따라 38선을 대체한 남북 경계선이다. 서해안 강화에서 동해안 간성까지 155마일(약 250㎞)에 이른다.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각각 2㎞까지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돼 있다. 정전협정은 이 지역에 무장력의 상주를 금지해 완충지대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쪽과 북쪽의 감시초소(GP·지피)를 따라 병력·중화기가 밀집해 있어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중무장지대’이다.

군사분계선 이남의 남측 비무장지대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다. 유엔군사령관이 비무장지대 남쪽 지역의 민사행정 및 구제 사업을 책임지며, 군인과 민간인의 비무장지대에 대한 모든 접근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제1조 제7~10항) 정전협정은 유엔군사령관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체결됐으며, 대한민국은 서명 당사자가 아니다.

경기도 파주의 비무장지대 안에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있다. 대성동은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속해 있다. 하지만 대성동은 유엔사 관할 구역이다. 유엔사의 공식문서에 ‘군사 점령지’라고 적시돼 있다. 대성동 주민들에 대해 대한민국은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지 못한다. 대성동 주민은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가 없다. 주민들은 경작권은 있지만 토지 소유권은 없다. 사법권도 제한된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다.

대성동 주민들은 1969년에야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대성동 주민들은 주민등록증 외에 또 다른 신분증인 빨간색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갖고 있다. 발행자는 유엔사 공동경비구역 대대장이다. 이곳을 출입하려면 우리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도 유엔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유엔사 허락이 없으면 대한민국 대통령도 들어갈 수 없다. 대성동은 유엔사 관할 구역이다.

2019년 8월 당시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파주 디엠지(DMZ) 평화의 길 개방 행사’(8월 9일 경의선 도라산역)에 참석하는 길에 대성동을 방문하려 했다. 하지만 유엔사는 “주민 불편”을 이유로 취재진의 동행을 불허했고, 김 장관은 대성동 방문을 포기했다. 대한민국 장관이 대한민국 국민이 사는 마을도 마음대로 방문하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지난해 12월엔 군복 차림으로 비무장지대를 방문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 대해 유엔사가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문제를 제기한 일도 있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0일 대선 후보 신분으로 전투복 상의에 헌병 완장을 차고 강원도 철원의 최전방 부대인 육군 3사단 백골부대 전방관측소 등을 찾았다. 그러자 유엔사는 다음날 홈페이지에 ‘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진상 조사하겠다’라는 보도자료를 올렸다.

이런 해프닝이 발생하는 원인은 군사분계선 이남의 남측 비무장지대에 대한 관할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70년이 다 되도록 여태 온전한 주권을 이양받지 못한 것은 나라와 민족의 수치다. 대한민국 장관뿐 아니라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대한민국 땅을 자유롭게 방문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가 무색하다.

게다가 남측 비무장지대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는 유엔군사령부의 실체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유엔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일본 도쿄에서 창설돼 1957년 7월 서울 용산기지로 옮겨온 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엔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서 유엔사를 유엔의 공식 군대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알고 보면 유엔사는 ‘유령군대(ghost army)’에 지나지 않다.

유엔사는 1950년 7월 7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의거하여 창설됐다. 그런데 위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미국 주도하의 ‘통합군사령부’ 창설 권고였지 ‘유엔군사령부’의 창설 결의가 아니었다. 미국은 통합군사령부를 유엔군사령부라고 작명을 하여 유엔사가 마치 유엔의 군대인 것처럼 가장했다. 유엔사 사령관은 유엔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임명했고, 재정도 유엔이 부담하지 않았다.

1975년 11월 유엔총회 제30차 회의에서 유엔사를 해체하라고 촉구하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유엔사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한·미는 1978년 11월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연합사로 넘기고, 유엔사를 정전협정의 관리기구로 역할을 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바뀌어도 유엔사와 연합사, 주한미군사령부는 이름을 달리할 뿐 실체는 하나이다. 유엔군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한다. 폴 라캐머라 미 육군 대장은 한미연합사령관까지 겸직하며 상황에 따라 사령관 모자 3개 중 필요한 것을 골라 쓴다. 사령관뿐만 아니라 상당수 참모들도 유엔군사령부, 한미연합사, 주한미군사령부의 참모 직책을 겸임하고 있다.

유엔사의 실체에 대한 유엔의 공식적인 유권 해석은 무엇인가. 2018년 9월 17일 유엔 주재 러시아대사가 유엔 사무국에 유엔사의 법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답변을 요구했다. 사무총장을 대신해 로즈메리 디카를로 사무차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했다. “한국전이 발발했을 당시 유엔 결의에 의해 미군이 중심이 돼 유엔참전국을 지휘하도록 결의한 바 있으나 유엔사는 미군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성됐다. 정전 이후 단 한 번도 미국으로부터 유엔사에 대해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협의를 요청받은 사실도 없다. 자신이 파악하는 한 유엔과 유엔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현재의 유엔사는 유엔의 ‘활동단체’도 ‘기구’도 아니며, 유엔의 ‘지휘’나 ‘통제’하에 있지도 않고, 안보리의 ‘보조기구’도 아니며 유엔의 예산 지원도 받지 않고 있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근거로 유엔사를 내세워서 비무장지대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사실상 사문화되었고, 정전협정의 시스템인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는 오래전에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유엔사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유령군대일 뿐이다. 언제까지 유령군대의 주권 침해를 지켜봐야만 할까. 주권국가로서의 자존과 체면이 걸린 문제다. (2022년 7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