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지난 8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1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진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여왕으로 70년 214일간 재임하여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국왕이다. 영국(Britain)의 정식 국명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영국은 연합왕국(UK, United Kingdom)이고 입헌군주국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한때 제국주의를 대표했던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존재다. 현재도 대영제국의 잔재로서 영국연방(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이 남아있다. 영연방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에서 지금은 독립했으나 여전히 영국 국왕을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 여기는 국가들의 연합체다. 영연방 56개 국가 중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 14곳에선 영국 국왕(현재 찰스 3세)이 공식 국가원수이다.

영국의 군주제와 왕실은 청산하지 못한 봉건시대의 낡은 유물에 불과하다. 21세기에 왕국이라니, 국왕이란 호칭 자체가 거부감과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독재 시대에 초법적인 월권을 행사했던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판한 데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군주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100년 전에 이미 조선 왕조시대가 끝났으며 국왕은 역사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죽음을 계기로 탈(脫)군주제와 영연방 탈퇴 움직임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1일 MBC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18살에서 24살 이하 젊은 세대들 가운데 10명 중 3명만 군주제에 찬성했고, 40대 이하에서도 왕실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절반에 그쳤다. 캐나다에선 지난 4월 설문조사 결과 “찰스 왕세자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응답이 65%에 달했다.

영연방 탈퇴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앤티가 바부다는 영연방과의 결별 의지를 밝혔다. 개스턴 브라운 총리는 새로 즉위한 찰스 3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만약 내년 선거에서 내가 재선에 성공하면 3년 안에 공화국 전환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겠다”라고 공언했다. 브라운 총리는 “우리가 진정한 주권 국가임을 분명히 하고, 독립의 고리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라고 강조했다.

호주에서도 야권을 중심으로 영연방 탈퇴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호주 연방의회 제3당인 녹색당의 애덤 밴트 대표는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튿날 “호주는 앞으로 나아가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가 “지금은 여왕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해야 할 때”라며 선을 그었지만, 정치권에선 이번 기회에 해묵은 과제인 ‘공화국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의 식민주의 유산을 대표한다. 마야 자사노프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는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영국 군주제의 폭력성을 은폐하는 위장 간판이었다는 주장을 폈다. 자사노프 교수는 여왕의 통치 시기이던 1952년에 케냐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인 ‘마우마우 봉기’를 예로 들었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케냐의 독립단체 마우마우를 잔혹하게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케냐인이 고문과 강간, 거세 피해를 당했다. 케냐 인권위원회는 마우마우 봉기 기간에 9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불구가 되고 16만 명이 구금된 것으로 추산했다. 자사노프 교수는 “여왕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그의 존재는 피비린내 나는 영국 제국주의 역사를 희석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꼬집었다.

AP통신에 따르면 케냐 변호사 앨리스 무고는 여왕이 사망한 당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나는 애도할 수 없다”면서 여왕이 통치하던 영국이 1956년 자신의 할머니를 비롯해 케냐인에게 발행한 ‘이동 허가서’를 트위터에 공개했다. 마우마우 봉기 이후 케냐인들은 이동의 자유도 없이 영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무고는 “할머니가 영국 군인들에게 구타당하고, 할아버지를 잃고 홀로 자녀들을 키워야 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며,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썼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야당인 ‘경제자유전사(EFF)’도 여왕이 영국 제국을 이끌었던 수장으로서 과거사에 대한 책임이 있으므로 애도를 표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여왕은 제국의 잔혹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세계 여러 곳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면서 “우리에게 여왕의 죽음은 이 나라와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매우 비극적인 시기를 떠올리게 하므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후에 정말 삶과 정의가 있다면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조상들이 마땅한 대가를 치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영국은 1967~1970년 나이지리아 정부군에 무기를 제공하며 내전에 개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비아프라 반군에 대한 학살을 지원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우주 안야 미국 카네기 멜런대 부교수는 여왕이 세상을 뜨기 몇 시간 전에 “도둑질과 강간을 일삼았던 대량 학살 제국의 최고 군주”라며 “그의 고통이 극심하기를 바란다”라는 트윗을 올렸다. 불과 몇 시간 만에 트윗은 리트윗됐고, 1만 개가 넘는 ‘좋아요’가 달렸다. 물론 너무 잔인하고 매정한 글이라고 비난하는 댓글도 있었다. 트위터 측은 안야 교수의 글이 규정을 위반했다며 삭제했다. 하지만 안야 교수는 다시 트윗을 올려 “누군가 인종 학살을 뒤에서 조종하고 우리 가족 절반을 유민으로 만들어 오늘날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게 만든 정부를 관장한 군주에게 경멸을 퍼붓는 것 말고 다른 일을 기대한다면, 여러분은 별을 보며 소원이나 빌면 된다”고 썼다.

심지어 영국 여왕의 죽음을 반기는 나라도 있다. 아일랜드가 대표적이다. 8일 아일랜드 더블린 주 경기장에선 여왕의 죽음을 축하하는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축구 경기장에서 팬들이 응원가를 개사한 영상 “리지가 관짝에 들어갔다(Lizzy’s in a box)!”는 트위터에서 15만 개의 ‘좋아요’를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온라인상에서는 아일랜드인들이 도로 위에서 경적을 울리거나 깃발을 흔들며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한 영상도 잇따랐다.

아일랜드는 1171년 헨리 2세의 침공 이후 800년간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영국이 고유어 사용을 금지하면서 아일랜드의 자국어인 게일어는 거의 말살됐다. 영국은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을 소작농으로 만들어 곡물을 수탈했다. 1845년 감자 역병으로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1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1972년에는 영국 공수부대가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영국계 신교도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행진하던 비무장 가톨릭교도들에 총격을 가해 14명이 사망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아일랜드인들의 반영 감정은 매우 강하다. 아일랜드 사람에게 “영국인 같다”고 하는 말은 한국인에게 “일본인 같다”고 놀리는 일과 같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일제 식민지의 뼈아픈 역사를 겪었던 우리로선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를 눈감아줄 수 없다. 아일랜드 백성들이 겪었을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가령 일본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면 우리가 그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할 건가? 더구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조차 없었다고 한다면, 추모는커녕 애도조차 표시하고 싶지 않은 게 절대다수 국민의 정서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죽음을 조롱하고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은 행위는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 정서에 비춰보면 적절치 않겠지만)

만일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의 천황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한다면 어떨까? 국민적인 분노를 유발하고 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내외가 영국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18일 출국했다. 그런데 우리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유감 한마디조차 찾을 수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였건만. (2022년 9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