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실종과 국정 마비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경제 상황에 대한 걱정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1년간 우리나라 경기 전망을 물은 결과, 66%가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했고 ‘좋아질 것’이라는 의견은 11%에 그쳤다. 18%는 ‘비슷할 것’이라고 답했고 5%는 의견을 유보했다. 경기 낙관론은 올해 1월 30%에서 10월 11%로 줄었고, 반면에 비관론은 29%에서 66%로 늘었다. 악화일로다. (주1)

최근 국내 금융시장이 크게 불안정해지고 있다. 부랴부랴 정부와 한국은행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 대응에 나섰다. 추경호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은 총재 등은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회사채 시장과 단기 금융시장의 불안 심리 확산과 유동성 위축을 방지하기 위해 50조 원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한다고 밝혔다.

정부의 대규모 유동성 공급 대책이 나온 것은 회사채 시장이 최근 급격히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회사채는 기업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이다. 최근 주요 기업들이 회사채 입찰에 나섰다가 유찰되는 사례가 잇따랐다. 지난 17일 최고 신용등급(AAA)인 한국전력공사가 4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2800억 원 조달에 그쳤다. 한국도로공사(AAA등급) 역시 같은 날 1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시도했으나 전액 유찰되는 굴욕을 맛봤다.

채권시장에는 올해 말까지 13조 원, 내년 상반기까지 54조 원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온다. 하지만 우량기업의 자금 조달마저 차질을 빚을 정도로 최근 채권시장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다. 올 3분기 신용등급 A 회사채 중 매각되지 않은 것이 58%에 달한다. 작년 같은 기간에는 이 비율이 1%였다. 새 회사채 발행이 멈추면서 만기채 상환이 큰 차질을 빚고 채권시장에 대한 우려가 팽배해 있다.

10월 회사채 발행액은 19일까지 1조2362억 원으로 올해 1월(8조7710억 원)의 7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고 금리는 급등했다. 중견·중소기업의 자금 사정은 신용등급이 높은 대기업보다 훨씬 심각하다. 연 10% 이상 고금리를 제시해도 투자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비우량 회사채(BBB-등급, 3년 만기) 금리는 지난 21일 연 11.59%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2010년 1월 이후 12년 9개월 만에 최고치다.

급등한 금리, 부동산 경기 침체로 불안감이 감돌던 채권시장에 직격탄을 날린 건 강원도의 레고랜드 부도 사태다.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춰 문을 연 레고랜드는 덴마크 조립식 장난감 레고를 테마로 한 놀이공원이다. 강원도와 레고랜드 운영사인 영국 멀린엔터테인먼트그룹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출자해 만든 회사가 강원도중도개발공사(GJC)이고, GJC는 공사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재작년에 2050억 원어치의 기업어음을 발행했다. 이 어음은 강원도가 지급 보증을 섰고 지급 기일이 지난달 29일이었다. 그런데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보증 의무 이행 능력이 없다며 지급을 거절했고, 이 기업어음은 지난 6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레고랜드 부도 사태의 충격이 금융시장을 크게 흔들었다.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신용등급을 인정받는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어음이 부도를 냈기 때문이다. 국가가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는 충격은 채권시장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정부마저 채권 보증 능력이 없다는 공포감이 시장에 퍼지면서 증권가 소식지를 통해 건설사, 증권사 등의 연쇄 부도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정보가 돌았다. 레고랜드 기업어음을 많이 들고 있거나, 부동산 개발사업 대출이 많은 증권사들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21일 다올투자증권과 한양증권은 매각설이 가짜뉴스라면서 금융감독원에 자진 신고를 접수했다.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어 자금난에 시달리는 일부 건설업체들도 덩달아 부도설에 휩싸였다. 충남 지역 6위 종합건설업체 우석건설이 최근 1차 부도가 났다. 대형 건설사 가운데는 시공능력평가 8위인 롯데건설의 자금난이 입길에 오르고 있다. 롯데건설은 지난 20일 롯데케미칼로부터 3개월간 5천억 원을 차입한다고 밝혔다. 롯데케미칼과 호텔롯데 등을 대상으로 2000억 원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한 지 이틀 만이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한 미분양 증가는 건설업계에 치명적인 위험 요인이다. 국토교통부 집계를 보면, 8월 말 기준 전국의 미분양 아파트는 총 3만2722호로, 전달보다 4.6% 증가했다. (주2) 이 가운데 수도권은 5012호로 전달 대비 10.7% 늘어나면서 증가세가 가팔라지고 있다.

레고랜드 부도 사태의 여파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강원도는 뒤늦게 보증채무를 갚겠다고 입장을 번복하는 해명에 나섰다. 김진태 지사는 21일 “예산을 편성해 늦어도 내년 1월 29일까지 GJC 변제불능으로 인한 보증채무를 강원도가 상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채권시장의 불안은 치솟을 대로 치솟은 후였고, 자본시장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23일 중앙정부까지 나섰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직접 나서서 “모든 지자체가 지급 보증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예정임을 확약드린다”고 진화에 나섰다. 여당 소속인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일으킨 파장에 대한 사후 대응인 셈이다.

정부와 한은이 뒤늦게 금융시장 경색에 대응해 나섰지만, 과연 얼마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레고랜드 사태가 촉발한 자금 경색은 위기의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더 어려운 상황이 닥칠 가능성이 크다. “금융위기는 사람들이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를 잃기 시작할 때 더 악화된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가 수상 직후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다. 윤석열 정부의 위기 대응을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평가가 5주 연속 긍정률 20%대, 부정률 60% 이상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평가는 27%로, 반면에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65%에 달했다. 윤 대통령 직무 긍정률은 5주째 30%를 밑돌고 부정률은 60%를 웃돈다. 9월 4주차부터 5주 연속 같은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주3)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신뢰의 위기가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3고(고물가·고환율·고금리)에 따른 경제위기가 가팔라지고 민생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경제위기와 민생 파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온통 색깔론 몰이에만 올인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의 극우 발언을 감싸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종북 주사파” 카드까지 꺼냈다. 그는 19일 국민의힘 원외당협위원장 초청 오찬에서 “종북 주사파는 반국가 세력이고, 반헌법 세력이다. 이들과는 협치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치적 맥락으로 보면 야당과 협치를 하지 않겠다는 발언이었다.

이날(19일) 검찰이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이재명 대표 측근인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정치자금법 위반 물증을 찾는다는 명분이었다. 1979년 8월 YH무역 노동자 진압을 위한 공권력의 신민당사 침탈 이래 제1야당 당사 압수수색 시도는 43년 만에 처음이다. 민주당은 국정감사 전면 중단을 선언하고 압수수색을 막아섰다. 검찰의 압수수색 시도는 대검에 대한 국정감사 전날 이뤄졌다. 정치적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년 예산 국회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다. 윤 대통령이 25일 국회에서 2023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한 뒤, 국회는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을 심의해 12월 2일 안에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정국이 극한 대치 상황이라 불투명하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신뢰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면, 시정연설을 결코 용인할 수 없다”며 국회 시정연설을 거부하겠다는 태세다. 민생은 최악의 위기 상황인데 정치는 실종이고 국정은 마비 상태다. (2022년 10월 24일)

주1)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제516호. 10월 18~20일(10월 3주) 전국 성인 1000명 대상 조사 결과(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주2) 지난해 말 미분양 아파트 1만 7710채와 비교하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주3)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제5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