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선언과 핵 공유의 정신 승리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30일 귀국했다. 정부·여당은 이번 방미의 최대 성과로 ‘한국형 확장억제’ 방안을 담은 ‘워싱턴 선언’을 내세우고 있다. 26일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갖고 ‘워싱턴 선언’을 발표했다. 양국이 ‘핵협의그룹’(NCG)을 설립해 미국의 확장억제 계획을 공유·논의하고 전략핵잠수함(SSBN) 등 미국의 전략무기를 더 자주 전개하되, 한국은 독자 핵무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정상회담이 열린 당일 워싱턴 현지 브리핑에서 “한미 양국은 이번에 미국 핵 운용에 대한 정보 공유와 공동계획 메커니즘을 마련했다”며 “우리 국민이 사실상 미국과 핵을 공유하면서 지내는 것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 정부 당국이 즉각 핵 공유를 부인하고 나섬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에드 케이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국장은 워싱턴DC 국무부에서 열린 한국 특파원단과 브리핑에서 ‘한국 정부는 워싱턴 선언을 사실상 핵 공유라고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냥 매우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우리는 이 선언을 사실상 핵 공유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미 당국자는 핵 공유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상 핵 공유’(de facto nuclear sharing)라는 표현조차도 강하게 부인하였다. 외교상 무례하게 비칠 정도로 직설적인 발언으로 윤석열 정부의 자의적인 해석을 반박한 것이다.

미국은 왜 이렇게 핵 공유에 대해 예민하고 단호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케이건 국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에게 핵 공유는 중대한 함의가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 입장에서 핵 공유에 대한 정의는 핵 공유는 핵무기의 통제가 어디에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여기(워싱턴 선언)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할 의사가 없으며, 핵 사용에 대한 권한은 미국의 ‘단일 권한’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핵 공유의 정의와 관련해 명확하게 쐐기를 박은 건 두 가지다. 첫째, 미국은 한국에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도 전날 윤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제1조(핵무기나 여타 핵폭발 장치, 그러한 무기나 장치의 관리권의 직간접적 양도 금지) 및 제2조(핵무기나 여타 핵폭발 장치, 그러한 무기나 장치의 관리권에 대한 직간접적 양수 금지) 위반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핵 공유’뿐 아니라 ‘사실상의 핵 공유’라는 표현까지 강하게 부인하면서 확실하게 선을 그은 이유이다.

둘째, 핵무기의 통제(control of weapons)는 미국의 ‘단일 권한’이라는 점을 다시금 명확히 한 것이다. 미국은 핵무기 사용에 대해 독점적이고 배타적이며 최종적 권한을 미 대통령만이 보유한다는 ‘단일 권한’ 입장을 철저히 유지하고 있다. ‘워싱턴 선언’을 통해 한국에 대해 한층 강화한 확장억제 공약을 확인했지만, 결코 핵무기 사용 ‘단일 권한’을 한국과 공유하진 않는다. 미국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권한을 다른 나라와 나눠 갖지 않으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 미 핵무기 버튼은 오직 미 대통령 책상과 그의 핵 가방에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미 양국이 ‘핵협의그룹’을 설립해 미국의 확장억제 계획을 공유·논의하기로 했다지만 그 실효성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핵협의그룹’은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운용 중인 ‘핵기획그룹’(NPG)를 모델로 한 것이다. 현재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튀르키예에는 항공폭탄인 B61 전술핵폭탄 등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돼 있다. 미국과 나토는 이 핵 자산을 공동으로 관리·운용하기 위해 1966년 ‘핵기획그룹’을 창설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나토에게 핵 사용의 최종 결정권이 있는 건 아니다. 나토는 미국과 핵무기를 공동 관리하고, 운용 계획을 같이 논의하며, 실제 사용 시 나토의 핵 투발 수단 등을 이용해 공동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핵무기 통제는 철저하게 미국의 ‘단일 권한’이다. ‘나토식 핵 공유’라는 표현은 냉전 시기 나토 회원국의 핵 비보유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레토릭’(외교적 수사)일 뿐이다. 군사적인 의미에서 엄밀하게 정의하면 핵 사용권의 공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과 나토는 군사적 조건과 상황이 전혀 다르다. 나토식 핵 공유의 기본전제는 핵탄두가 나토국 군사기지에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미 간엔 공유할 핵, 즉 한국에 배치된 미국 전술핵이 없고 향후 재배치할 계획도 없다. 그러므로 한미 간 핵 공유는 기본전제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 설치한다는 한미 협의체의 명칭도 ‘기획’이 아닌 ‘협의’다. 더구나 ‘핵협의그룹’은 차관보급 회의체에 불과하다. 이미 한미 간에는 차관보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터에 차관보급의 새로운 협의체를 설치한들 그게 과연 어떤 실효성이 있을까? ‘핵협의그룹’을 설치해봤자 실효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부·여당의 행태는 가관의 꼴불견이다. 28일 국민의힘 원내대책회의에서는 ‘핵 공유’ 합창이 벌어졌다.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핵 문서는 사실상 최초의 핵 공유 선언문”이라며 “미국이 확장억제 관련해 정책적 선언과 공약은 한 적이 있지만, 별도의 문서로 구체화한 것은 워싱턴 선언이 처음”이라고 추켜세웠다. 국방위 여당 간사인 신원식 의원은 “미국이 타국과 핵 공유 관계를 맺은 건 나토에 이어 대한민국이 두 번째”라며 “미국이 가진 귀한 수단인 핵을 대한민국과 공유했다”고 핵 공유를 기정사실로 단정했다.

그런데, 미국이 핵 공유를 부인하자 국민의힘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몰리게 됐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 후 기자들이 ‘미국 입장을 확인 한 건지’ 묻자, “미국의 입장을 아직 확인하지 못해 확인하고 판단하겠다”고 즉답을 피했다. 뒤늦게 국민의힘 관계자는 “핵 공유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그런 건 줄 몰랐다”면서 “앞으로는 당에서 핵 공유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고 변명했다.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한심한 민낯을 드러내는 짓거리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8일이 돼서야 “우리가 미국과 핵을 공유하는 것은 아닌 게 맞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사실상 핵 공유로 느낀다는 것과 핵 공유가 아니라는 것이 (한미 간) 입장 차이라 보지 않는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핵 공유는 아니지만, 사실상 핵 공유라고 느끼면 된다는 건가? 황당한 궤변이고 대단한 정신 승리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당권 주자 당시 핵 공유 등 논의에 대해 “국제적 우호 협력만으로는 나라를 지키기에 결코 충분하지 않다”며 “평화를 지키려면 북핵과 동등한 핵을 확보하는 수밖엔 없다. 핵을 제외한 다른 어떤 논의도 현실 회피와 눈속임일 뿐”이라며 독자 핵무장을 역설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홍준표 대구시장, 오세훈 서울시장, 유승민 전 의원 등 국민의힘 주요 인사들도 이구동성으로 독자 핵무장론을 주장했다.

‘워싱턴 선언’에는 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의 의무와 한미 원자력협정을 준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이 독자 핵무장을 하지 않겠다고 공약하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줄곧 독자 핵무장을 떠들던 여당 관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핵 공유도 핵무장도 부정하는 ‘워싱턴 선언’을 칭송하기에 바쁘다. 김기현 대표는 “워싱턴 선언은 사실상 전술핵 재배치와 같은 효과”라고 강조했다. 미 대통령이 한국에 핵무기 재배치를 안 한다고 명확히 밝혔는데도, 앞뒤로 ‘사실상’ 전술핵 재배치 ‘효과’를 갖다 붙이면서 정신 승리를 만끽하고 있다. 궤변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2023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