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돌의 한반도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지난 27일은 한국전쟁 정전 70돌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한반도에서는 전쟁의 포성이 멎었다. 정전은 교전 쌍방 간에 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뜻하며, 정전협정은 종전을 합의하기 전에 군대끼리 전쟁을 잠시 멈춘다는 협정이다. 정전은 전투를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일 뿐 국제법상으로는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

길이 250km, 폭 4km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 양측에 대규모 군대가 상시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고 대치 상태에 있다.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일시 중지의 정전 상황일 뿐이다. 정전으로 총성은 멈췄으되 종전이 아니므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The Never-Ending War)이다.

‘3년 전쟁, 70년 정전’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이런 비정상 상태가 두 세대 넘게 이어지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정전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게 현실이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25일 발표한 청소년(13~18세) 대상 통일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전협정 체결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1000명 가운데 60.8%에 불과했다.

남북은 정전협정 체결일인 27일을 앞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정전을 기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과 함께 유엔군 전사자가 안치된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유엔군 위령탑 앞에서 묵념했다.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설에선 유엔군의 희생에 감사했다. 북에서는 27일 저녁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러시아 고위 사절들과 함께 ‘전승절’을 기념하며 북·중·러 연대를 과시했다.

남과 북은 최근 ‘핵전쟁’ ‘정권 종말’ 같은 험한 언사를 주고받으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강대강의 대결이 점점 더 첨예해지는 양상이다. 대립이 첨예해지면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우발적 충돌의 우려가 커지고 자칫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비화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은 지난 22일 보도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반도는 며칠 안에 별다른 예고 없이 전쟁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정전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시작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전쟁 담론이 출몰하곤 했다. 돌아보면 정전체제 70년의 한반도에서 전쟁을 가볍게 여기는 허황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전쟁 담론이야말로 가장 위험천만한 궤변이었다. 특히 군대도 안 가고 총 한 방 쏘아보지 않은 편법 병역기피자 무리의 위정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일전불사를 외치는 희극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추태가 아닐 수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군에서 잔뼈가 굵고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권좌에 오른 뒤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다.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채워보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테고, 위기관리를 통해 전쟁의 위험을 억지해야 한다는 군사적 목적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남북 간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대북 비밀 특사로 활동했던 박철언의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은 북의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전쟁 억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전 대통령은 … ‘어떤 이유에서든 남북한 간의 전쟁은 강대국의 개입을 불러오고, 이로 인해 남북한은 모두 풀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며 민족의 멸망은 불을 보듯 하다’면서 전쟁 억지는 남북 지도자의 소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이 “지도자의 소명” 운운한 것은 가증스럽고 철면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독재 권력에 부역한 정치 검사 출신 정치인 박철언의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땅에서 어떤 사태가 전개되고 얼마나 끔찍한 참상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인식 자체는 틀린 게 아니다. 한국전쟁을 겪었고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전두환이 전쟁의 참상을 모를 리 없다.

1994년 6월, 이른바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은 북의 영변 핵시설을 ‘외과수술식’으로 선제공격하려 했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 거주하던 미국 시민권자들에게 대피할 것을 권했고, 한국 사회에선 전쟁 공포가 퍼지고 라면과 물 사재기 파동이 벌어졌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는 결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협상을 통해 극적으로 수습되었다.

사후에 밝혀졌지만, 미국은 영변 공격 계획을 이미 접은 상태였다. 1994년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페리는 훗날 회고록에서 북의 보복 공격과 전면전 확대 가능성 때문에 “펜타곤 회의에서 공격 계획은 테이블 끝으로 밀려났다”고 밝혔다. (윌리엄 J. 페리, 『핵 벼랑을 걷다』) 미국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결과 전쟁 피해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미군 8만~10만 명, 한국군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전쟁 발발 24시간 이내 서울 주변에서만 민간인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됐다.

그게 벌써 30년 전 일이다. 2017년 11월 북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독자 핵무장을 한 몇 안 되는 ‘전략국가’임을 강조하고 지난해 9월엔 핵 무력을 법제화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뒤 발표한 ‘워싱턴 선언’에서 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기로 하고 핵잠수함 등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상시 전개를 밝혔다. 지난 18일 서울에서 첫 핵협의그룹 회의가 열렸고, 42년 만에 미국 전략핵잠수함(SSBN)이 부산에 기항했다. 그러자 북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략핵잠수함을 겨냥해 단거리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발사했다.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 피해는 30년 전 1차 북핵 위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고 상상을 초월한다. 한반도는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ance Destruction), 약자로 미친(MAD) 짓이 작동하는 공간이며, 전쟁이 벌어지는 전역은 단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쟁 불사를 외친다면 이거야말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생즉사 사즉생’을 외운 윤 대통령은 과연 전쟁이 뭔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정전협정 70돌을 맞아 27일(현지시간) 미국 의회에서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브래드 셔먼 민주당 의원은 이날 미국 의회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라는 주제로 브리핑을 열고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셔먼 의원은 지난 3월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을 골자로 한 ‘한반도 평화법’을 발의했고, 이 법안에 하원의원 33명이 동의한 상태다.

같은 날 오전 바버라 리, 잰 셔카우스키, 주디 추 민주당 하원의원도 기자회견을 열어 평화협정 추진을 요구했다. 이 기자회견에는 한국 파견 때 핵무기 관리를 맡았던 댄 리프 전 미군 태평양사령부 부사령관도 참석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한 리 의원은 이날 <뉴스위크> 기고에서 “한반도의 최근 상황은 전쟁 종식이 시급함을 보여준다”며 “의회 동료들은 한국전쟁 정전 70돌을 맞아 전쟁을 끝낼 정식 평화협정 체결 노력에 동참해달라”고 썼다.

한국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8일 ‘정전협정 70주년, 한반도 평화 구축 촉구 결의안’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당 소속 의원 168명 전원 명의로 결의안을 발의했다. 이 결의안은 향후 외교통일위원회를 거쳐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될 예정이다. 하지만, 국회 통과에는 큰 난관이 예상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반대할 게 빤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70년, 하루빨리 ‘끝나지 않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면 모두 ‘가짜 평화’로 규정하고, 종전을 촉구하는 사람들을 ‘반국가세력’으로 치부한다. 그들은 극우 반북 유튜버를 통일부 장관 자리에 앉히고, 서슴없이 전쟁 불사를 외친다. 정전 70돌,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2023년 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