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휴전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야 한다.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 회원국 정상들이 한목소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21일(현지시간) 화상으로 열린 특별정상회의에서 브릭스 회원국 정상들은 즉각적이고 지속가능한 인도주의적 휴전과 민간인 인질 석방을 촉구했다.

이번 정상회의는 지난달 7일 전쟁이 발발한 뒤 브릭스 회원국들의 첫 공동회의다. 기존 5개 회원국뿐만 아니라 내년 1월부터 새 회원국으로 가입이 확정된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아랍에미리트(UAE)도 초청됐다. 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참여했다. 각국 정상을 비롯한 브릭스 11개국 대표는 이날 회의를 마치며 ‘적대행위의 종식으로 이어지는 즉각적이고 지속가능한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의장국인 남아공의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해 가장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불법적인 무력을 사용하여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집단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전쟁 범죄”라면서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고의적으로 의약품, 연료, 식량, 물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집단 학살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또 적대행위 중단을 감시하고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유엔군 투입을 제안했다.

앞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방글라데시, 볼리비아, 코모로, 지부티와 함께 이스라엘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했으며,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고 외교관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직속 장관 쿰부조 은차베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영장 발부를 요구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난 8월 자국에서 열린 연례 브릭스 정상회의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초청하지 못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전쟁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40년 넘게 억압적인 아파르트헤이트(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 분리 정책.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 통치를 경험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탄압에서 자국의 기억을 상기하며 전쟁 중단과 학살 규탄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

주로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춰왔던 브릭스가 국제 정치 및 안보 문제에 관해 정상회의를 열고 공동으로 목소리를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이 이런 종류의 최초의 회담이라고 말한다. 남아프리카국제문제연구소 스티븐 그루즈드 선임연구원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브릭스는 대체로 정치적, 안보적 이슈를 회피해 왔으며, 내겐 이와 비슷한 특별 정상회담이 소집된 기억이 없다”면서 “이는 브릭스가 서방을 기다리지 않고 점점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게 나아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평가했다.

한편 같은 날 중동지역 외무장관들은 중국에 이어 러시아를 방문해 가자지구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아랍연맹과 이슬람협력기구 대표로 나선 사우디, 요르단, 이집트, 인도네시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외무장관은 이날 모스크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 가자지구 해법을 논의했다. 이슬람권 외무장관들은 즉각적인 휴전, 가자지구 봉쇄 해제, 인질 석방을 주장했다. 라브로프 장관 역시 인질 석방과 인도적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해결하고, ‘두 국가 해법’에 기반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나흘 동안 전투를 멈추는 임시 휴전안에 합의했다. 지난달 7일 전쟁이 시작된 지 47일 만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22일 성명을 내어 “여성과 아이들 최소 50여 명의 인질이 나흘 안에 풀려나고 이 기간에 전투가 중지된다”며 “10명의 인질이 추가로 풀려날 때마다 휴전이 하루가 연장된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이 임시 휴전안에 합의한 것은 국제적으로 비판 여론과 압박이 커지고 국내적으로도 인질 가족들을 중심으로 석방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마스도 텔레그램을 통해 성명을 내어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 여성과 아이들 150명이 풀려날 것이라고 밝혔다. 하마스가 발표한 합의안의 내용은 △가자지구 전역에서 전투 중지 △의약품·연료 등을 실은 수백 대 인도주의 지원 트럭의 진입 허용 △가자지구 남부 지역에서 나흘 동안 드론 비행 중지, 북부 지역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6시간 동안 비행 중지 △가자지구 모든 지역 내 공격·체포 중지 △(가자지구 남북을 잇는 주요 간선도로인) 살라딘 도로를 통한 이동의 자유 보장 등이다.

나흘간의 임시 휴전을 하루 앞둔 23일에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 대한 공습을 이어갔다. 알자지라는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이스라엘군이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가 운영하는 학교를 공습해 최소 27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이스라엘군은 하마스와의 가자지구 휴전 기간에도 서안지구에서 공습을 가해 최소 8명의 팔레스타인이 숨졌다. 팔레스타인 뉴스통신사 와파(WAFA)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과 적신월사(적신월은 붉은 초승달이라는 뜻으로, 적신월사는 이슬람판 적십자사를 말한다) 본부를 에워싼 채 총격을 가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임시 휴전이 끝나면 전쟁을 재개한다는 방침이다.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은 23일 해군 특수부대를 방문해 “하마스와 짧은 전투 중지 이후에도 군의 작전은 강력하게 지속될 것”이라며 “전투는 최소 두 달 이상 더 지속될 것”이라 했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에서 “우리 군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가자지구 북부를 장악하는 것은 긴 전쟁의 첫 단계이며 우리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합의한 대로 24일부터 나흘간의 임시 휴전에 들어갔다. 24~25일 이틀 동안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이스라엘인 인질 26명(타이인 인질 등 포함 총 41명)과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팔레스타인인 수감자 78명을 맞교환했다. 남은 이틀 동안 예정대로 이스라엘 인질 50명 등이 모두 다 석방돼도 풀려나는 이들은 인질 전체(약 240여 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석방자 명단에 가족의 이름이 없는 이들은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7일 전쟁이 시작된 뒤 휴전 직전까지 숨진 팔레스타인 사람은 1만 4,854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어린이는 6,150명, 여성은 4천여 명이다. 다친 이들의 수는 3만 6천 명이다. 가자지구에서뿐만 아니라 서안지구에서도 이스라엘의 학살 만행이 급증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전쟁 시작 이후 약 230명의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군대나 정착민들에 의해 살해됐다. 또 약 2천여 명이 이스라엘군에 체포됐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일시 휴전으로는 팔레스타인의 고통과 참상이 끝나지 않는다. 임시 휴전으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와 탄압 만행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다. 일시 교전 중단 상태는 완전한 휴전이 아니다. 설령 나흘간의 짧은 휴전이 일시 연장되더라고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지구 봉쇄와 아파르트헤이트 통치는 전혀 변함이 없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휴전이 끝나면 최소 2개월간 치열한 전투를 재개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임시 휴전이 아니라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야 한다. (2023년 1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