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크리스마스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예수 탄생의 성지인 베들레헴은 성탄절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와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가 벌어진다. 구유 광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과 성대한 퍼레이드가 열리고, 사방에서 캐럴이 울려 퍼진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서안지구 베들레헴 중심가에 있는 예수탄생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장소 위로 세워진 기념 교회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교회에서 진행되는 미사는 전 세계로 중계방송된다.

하지만 발 디딜 틈조차 없던 예년과 달리 올해 예수탄생 교회는 텅 빈 복도에 덩그러니 촛불들만 불을 밝히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한다. 매년 평균 150만~200만 명이 방문했으나 전쟁 이후 관광객도 끊겼다. 올해 성탄절을 앞두고 베들레헴 내 모든 교회는 ‘가자지구에서 살해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애도하고 기리기 위해 전통적으로 개최해오던 축제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베들레헴에서 불과 70㎞ 떨어진 가자지구에서 2만 명 이상이 숨졌는데,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가를 부를 순 없어서다.

베들레헴에 있는 루터교 크리스마스 교회의 문테르 이삭 목사는 23일(이하 현지시각) “만일 예수께서 오늘 태어나셨다면 가자지구의 잔해 속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오늘 누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를 수 있겠나”라고 했다. 그는 부서진 시멘트와 돌더미 위에 놓인 아기 예수 인형을 가리키며 “팔레스타인의 성탄절은 이런 모습”이라고 슬퍼했다. 한나 하나이아 베들레헴 시장은 성탄절 메시지에서 올해를 ‘애도의 해’로 선포하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인 전쟁을 “인종청소”이자 “대량 학살”이라고 비판했다.

이스라엘군은 성탄 직전인 23일에도 가자지구를 향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날 공격으로 유엔개발계획에서 30여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지원 프로그램에 힘썼던 직원 이삼 무그라비와 아내, 자녀 5명을 포함한 대가족 70여 명이 한꺼번에 숨진 사실이 알려졌다. (팔레스타인은 땅이 좁고 경제 사정이 어려워 여러 형제가 몇 대에 걸쳐 함께 사는 경우가 흔하다) 유엔개발계획은 이날 성명을 내어 “유엔과 가자지구 민간인은 공격 대상이 아니고, 이 전쟁은 끝나야 한다”며 애도를 표했다.

22일 <AP> 통신은 전문가 분석 결과 석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 폭격 기간 동안 가자지구의 파괴 정도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군의 독일 폭격보다 더 크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미국 군사 역사가 로버트 페이프가 1942~1945년 연합군이 독일의 주요 도시와 마을 51곳을 폭격했을 때 이 지역의 40~50%가량이 파괴됐고 독일 전체로 보면 10%가량의 건물이 파괴됐지만 가자지구의 경우 건물 33%가 파괴됐다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통신은 또한 제이먼 밴덴혹 오레곤주립대 교수 등의 위성 데이터 분석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초기부터 공격을 집중한 가자지구 북부 건물의 61.6%, 이달 초부터 공격을 강화한 남부 칸유니스 건물의 24.7%가 파괴됐다고 전했다. 영국 런던에 기반을 둔 분쟁 추적 단체 에어워스에 따르면 2014~2017년 이라크에서 이슬람국가(IS) 격퇴 작전 동안 다국적군이 1만 5000회의 공습을 가한 데 반해 지난주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서 2만2000회의 공습을 가했다고 밝혔다고 <AP>는 전했다.

이스라엘 공격으로 인한 가자지구 사망자가 2만 명, 부상자는 5만2000명을 넘기며 어느 때보다 의료 서비스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세계보건기구(WHO)는 가자지구 북부에 이제 제대로 기능하는 병원이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고 밝혔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20일 소셜미디어(SNS)에 “가자지구 북부에서 부상자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었던 알아흘리 병원의 수술실이 “전문의, 전력, 연료, 물, 식량, 의료용품이 고갈되거나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가자지구 북부에는 제대로 기능하는 병원이 없다”고 밝혔다.

세계식량계획(WFP)은 21일 가자지구 인구의 4명 중 1명이 “재앙적 기아”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세계식량계획에 따르면 현재 가자지역 가정의 90%가 굶주리고 인구의 절반이 아사 상태이며, 깨끗한 물과 위생시설, 쉼터가 부족해 질병이 확산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18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의 식량과 물, 기타 기본 생필품에 대한 접근을 고의로 막고 있다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굶주림’을 이용하는 것은 전쟁범죄에 해당하므로 세계 지도자들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에 따르면, ‘구호품 공급의 고의적 방해를 포함하여, 민간인들의 생존에 불가결한 물건을 박탈함으로써 기아를 전투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 제8조 전쟁범죄 나-25) 그런데, 이스라엘 당국자들은 가자지구 주민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공급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는 전략을 공공연하게 연설과 성명에서 밝히고 있다. 심지어 그런 의도를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공습 초기부터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포위하고 전기, 식량, 물, 가스 등 모든 것을 차단했다”고 공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은 “짐승 같다”며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22일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단’이란 문구가 빠진 결의안(2720호)을 채택했다. 애초 아랍에미리트가 작성한 결의안에는 이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미국이 이 문구가 들어가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고집해 빠진 채 통과된 것이다. 이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팔레스타인의 리야드 만수르 주유엔 대사는 “즉각적 휴전이 없으면 (이스라엘에 의한) 전쟁범죄, 인류를 향한 범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막을 길이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1946년 제1회 유엔총회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는 유엔 정신과 목적에 반하고 또한 문명 세계에서 유죄로 인정된 국제법상 범죄라고 선언했다. 이어 1948년 유엔총회에서 제노사이드 협정이 채택되고 1951년 발효됐다. 제노사이드는 국제법상 범죄로서 방지와 처벌을 의무화하고 있다. 미국은 제노사이드 협정의 서명국으로서 집단학살을 방지하고 처벌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와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신 되레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고 변호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계속해서 휴전을 촉구하고 있으나, 미국은 앞서 유엔 안보리에서 제기된 두 차례 휴전 촉구 결의안에 대해 홀로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번번이 채택을 무산시켰다. (자세한 내막은 지난주 칼럼에서 다뤘다)

미국 정부는 그에 그치지 않고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보내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2016년부터 10개년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에 매년 38억 달러(약 5조1100억 원) 상당의 군사원조를 제공해왔다.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하자 바이든 정부는 지난 10월 140억 달러(약 18조8700억 원)의 이스라엘 추가 지원 예산을 의회에 요청했다. 제노사이드 협정의 명백한 위반이며, 제노사이드 공모죄에 해당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중앙통계청은 10월 7일 개전 이후 지난 23일까지 가자지구에서 숨진 이들이 모두 2만561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사망자가 가자지구 전체 인구 220만 명의 1%에 육박한다. 1주일간의 임시 휴전 기간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300명 가까이 숨진 셈이다. 참혹하지 않은 전쟁이란 없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참상은 너무 끔찍하다. 2년 가까이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사망자 약 1만 명(유엔 추정치)과 비교해도 두 달 넘은 가자지구에서의 학살은 너무 참혹하다. 오늘도 무고하고 끔찍한 희생이 이어지고 있는 2023년 성탄절은 ‘블루 크리스마스’다. (2023년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