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정치와 연합정치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나는 21대 총선은 4년마다 열리는 국회의원선거가 아니라 32년 만의 선거라고 누차 강조해 왔다. 32년 전 13대 총선의 결과로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되었듯이, 21대 총선의 결과 여당이 의석의 60%를 석권하는 압승을 거둬 단독 입법권을 행사하는 국회가 만들어졌다.

현행 소선거구제의 선거법이 제정된 건 1988년 3월이다. 그 전까지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대통령 선거제도를 바꾸었고 국회의원 선거제도도 바꿔야 한다는 민심을 반영한 것이 소선거구제 선거법 개정이었다. 3김의 세 야당,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은 강력한 지역기반을 갖고 있었기에 소선거구제 개편을 찬성했다.

12대 국회는 집권 민정당이 과반 넘은 의석(160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태우의 청와대와 민정당은 선거법 개정에 따른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고 자신들이 전국에서 1위를 휩쓸어 소선거구제가 자신들에게 절대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민정당은 세 야당과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야당 의원들의 국회 본회의장 진입을 막고 한밤중에 단독으로 소선거구제 개정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하지만 13대 총선 결과는 민정당의 참패였다. 민정당은 125석을 얻어 이전보다 의석수가 35석이나 줄어 과반에 훨씬 못 미쳤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70석(12대 국회보다 48석 증가)으로 제1야당에 올랐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59석(9석 증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35석(26석 증가)을 얻었다. 한치 앞도 못 내다본 여당의 참패로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되었다. 13대 국회에서 야당의 주도 아래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가 열리고, 국정감사가 부활했다.

21대 총선에선 민정당의 계보를 이어온 미래통합당이 참패했다. 그들은 총선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자기네가 이기는 선거만 생각했지 더불어민주당이 압도하는 21대 국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터다. 낡은 수구 세력이 무능해 빠진 건 32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민심을 잃은 정치세력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4‧15 총선은 촛불항쟁 이후 실시된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이다. 20대 총선이 2016년 4월에 실시되었고 촛불항쟁이 그 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20대 국회는 촛불 민심을 반영할 수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실각 당하고 구속돼 수감되었지만 새누리당은 당명만 바꿔달았고 의원들은 버젓이 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물며 태극기 부대에 포획된 채 탄핵 민심을 부정하고 되레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대들었으니, 참패는 예견된 결과였다.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은 의석수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투표에서 드러난 민심이다. 의석수는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을 합해 183석으로 60%가 넘지만, 비례 정당 득표를 보면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을 합쳐도 38.8%에 불과하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얻은 41.1%와 거의 같다. 반면에 미래한국당과 국민의당이 얻은 정당 득표는 40.6%이다. 민의의 왜곡이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지역구에서의 양당 득표를 계산하면 더불어민주당 49.9% 대 미래통합당 41.5%다. 만일 득표율에 따라 지역구 의석을 배분하면 126석 대 105석이다. 하지만 실제 의석수는 더불어민주당 163석 대 미래통합당 84석으로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21석의 차이가 무려 79석의 차이로 벌어진 것이다. 소선거구 선거제도의 결과이다. 선거제도의 왜곡 효과가 3.8배나 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투표해 봐야 결과가 심각하게 왜곡되면 유권자의 입장에선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가 커질 수밖에 없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반감의 반정치주의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선거제도의 왜곡 효과가 심각하므로 선거제도 개혁이 정치개혁의 선결조건으로 된다는 것이 자명한 결론이다. 선거제도 개혁의 핵심이 비례성의 강화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선거법과 정당법 개정을 비롯하여 일련의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데서 현실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선거법을 바꾸려면 기득권을 가진 거대정당이 동의를 해줘야 하는 구조적 모순이 있다. 21대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선거법의 개정에 동의하고 추진하지 않으면 현실적 가능성이 없다. 결국 선거법은 거대 여당의 선거 유불리에 대한 판단에 따라 개정 여부가 결정될 테고, 선거법이 바뀌는 경우에도 누더기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데서 오로지 여당의 처분만 바라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일까? 돌파구는 있다. 거대 여당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으면 된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려면 야당 의원들 외에도 새누리당 의원 28명 이상의 찬성 합류가 필요했었다. 새누리당 의원들로 하여금 탄핵에 찬성하도록 밀어붙일 수 있었던 동력은 촛불 시민의 힘이었다.

득표율에 비해 너무 심하게 차이가 나는 의석수는 잘못된 선거제도 탓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도를 개선하려면 그것을 추동할 수 있는 조직된 힘이 있어야 한다. 우려가 되는 것은 정치의 ‘팬덤’(Fandom) 현상이다. 팬덤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등의 유명인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무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연예인 팬클럽이 결성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것처럼, 정치 영역에서도 정치 지도자를 따르고 지지하는 팬들의 집단이 형성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팬덤의 폐해는 진영 논리에 치우친다는 점이다. 진영 논리란 자신이 속한 진영의 것은 무조건 옳고, 다른 진영의 것은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하여 배척하는 논리를 말한다.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조국 사수’와 ‘조국 사퇴’로 편이 갈라져 정치 공방을 벌인 것이 대표적이다. 정치적 입장을 결정함에 있어서 언행의 사실관계나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느 편에 속하느냐 여부만을 갖고 판단하게 된다면 지지자의 열광과 반대자의 냉소로 양분돼 버리고 만다.

정치에서 팬덤은 유해하다. 팬덤 정치는 시민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구경꾼(팬)으로 전락시킨다. 팬덤의 약점은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나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팬들이 지도자 개인의 결정과 행위에 집중하는 동안에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체제는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만다. 정치인 개인의 도덕성과 능력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정치 구조와 법률 제도는 간과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역, 이념, 젠더, 세대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하다. 물론 다양하고 다원화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대립과 갈등의 양상이 벌어지는 것을 나쁘게 볼 건 아니다. 문제는 사회갈등지수가 높다는 것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의 대립과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의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상생의 협치가 가능하려면 제도 정치가 순기능을 해야 하고, 다당제의 연합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팬덤 정치의 극복이 선결 과제이다.

21대 총선은 여당에게 힘을 실어주어 책임정치를 구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민주당은 힘이 강해진 만큼 그에 비례하여 책임과 부담도 커졌다.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개혁에 실패하면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시험대에 올라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더 이상 야당 탓을 할 수 없게 됐다. 민심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는 일은 온전히 정부 여당의 몫이다. 성공의 지름길은 팬덤 정치를 극복하고 연합정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2020년 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