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우리는 선진국’인가?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노동부는 4월 비농업 일자리가 2050만 개 줄었다고 발표했다. 월별 일자리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39년 이후 가장 큰 손실이다. 4월 실업률은 14.7%로 치솟아 관련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한 1948년 이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2월 실업률은 3.5%로 5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실업자는 전달 720만명에서 한 달 만에 1590만명이 폭증해 2310만명으로 집계됐다. 미국 노동인구 7명 중 1명꼴로 일자리를 잃었다. 코로나19가 야기한 초유의 실업대란이다.

이날 발표된 고용 상황 보고서는 코로나19가 미국에서 본격 확산된 이후 미국 경제에 준 충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자택대기 명령과 이동 제한 조치의 직격탄을 맞은 레저·음식점·유통 업종을 비롯하여 전 업종에서 일자리가 줄었다. 음식점·호텔·레저·관광 등 접객업 770만 개, 유통업 210만 개, 제조업 13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 정부 일자리도 예산 부족으로 100만 개 가까이 사라졌다. 사무직 210만 개, 보건의료 분야 일자리도 140만 개 줄었다.

전문가들은 4월 통계가 실제 실업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실업률 통계는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산출된다. 하지만 사상 초유의 전국적인 봉쇄 조치로 경제 전체가 셧다운 된 상황에서 작성된 실업률 통계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노동부도 ‘기타 이유’로 일하지 않고 있다고 응답한 근로자를 실업 또는 무급휴직으로 분류할 경우 실업률은 약 20%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 세계를 멈춰 세운 코로나19 사태 이후의 세계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에 비유될 정도다. 대공황 이래 어떤 경제 위기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8일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세계 경제 위기와 관련해 “블랙스완(Black Swan)에서 나아가 네온스완(Neon Swan)도 배제할 수 없는 시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네온스완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백조’를 뜻하며, 그런 백조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절대 일어나기 어려운 확률이지만, 실제 발생할 경우 시장에 미치는 충격이 블랙스완보다 더 크다는 의미의 금융 용어다.

한국 경제도 피해가 막대하다. 4월 수출이 급감하면서 99개월 만에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관광·여행, 음식·숙박업에서 시작된 서비스업 위축이 제조업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실업의 공포가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일용직에 그치지 않고 정규직과 중견기업, 대기업 노동자들까지 확산되고 있다. 고용의 충격파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도 더 클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통계청이 모레(13일) 4월 고용동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코로나19 여파를 반영한 충격적인 실업 통계가 발표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한국과 미국의 상황이 다르지만, 대규모 실업 사태는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악의 고용 상황을 상정하고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통계청의 4월 고용동향 발표 사흘 전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전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다”는 발언이다. 문 대통령은 “고용보험 적용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국민취업지원제도를 시행해 우리의 고용안전망 수준을 한 단계 높이겠다”고 밝혔다.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보험 가입을 조속히 추진하고,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예술인 등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빠르게 해소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고용보험은 실직자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하면서 재취업을 유도하고 직업훈련을 지원하는 제도다. 1명 이상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업체는 모두 가입해야 하며, 사업주와 근로자가 보험료를 반반 부담한다. 고용보험 가입자 수는 1378만2000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 2778만9000명의 절반도 안 된다.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예술인 등은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다. 자영업자도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지만 소득이 불안정하고 비용 부담을 이유로 가입을 꺼려 가입률이 저조하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자영업자 수는 2만4731명으로, 전체 자영업자 553만7000명의 0.4%에 불과하다. (2020년 3월 기준)

고용보험 확대와 함께 문 대통령은 “한국형 실업부조제도인 국민취업지원제도도 조속히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취업지원제도는 고용보험의 혜택을 못 받는 취업준비생이나 장기 실직자 등에게 구직촉진수당과 맞춤형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때 50만원씩 6개월간 지원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생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나마 시행이 되려면 국회에서 국민취업지원제도의 근거법률이 통과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그 제도가 노동자의 실직과 서민의 생계위협으로부터 삶을 지키는 안전판 역할을 했는가? 한국에서 사회복지 정책이 본격 시행된 것은 김대중 정부 때였다. 취약 계층에 대한 기초생활 보장과 자활 사업 및 생계 지원 사업을 중심으로 한 공적 부조, 아동‧노인‧장애인‧여성을 포괄하는 사회복지 서비스, 의료보험, 국민연금, 고용 및 산재보험과 같은 사회보장제도 등 여러 영역에서 제도화가 이루어지고 사회보장과 복지 관련 지출 역시 괄목할 만한 증가를 보였다.

하지만 이런 양적 지표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경제 개혁의 최우선 순위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였다. 금융 개혁, 기업 구조조정, 공기업 민영화와 같은 다른 개혁 정책들도 인력 감축을 수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실업 증가와 고용 불안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1998년의 노사정위원회를 거쳐서 김대중 정부는 비정규직의 제도화와 정리해고의 자유화를 도입‧시행하였다. 그 결과 노동자의 고용이 심각하게 불안정해지고 노동자의 삶이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완화하는 보완장치로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사회적 안전망’의 정책 권고를 수용하였다. 사회적 안전망의 도입은 구조조정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실업자‧저소득층‧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생산적 복지’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빈부 격차의 증대와 사회의 양극화, 헬 조선으로 구조화된 민생의 위기가 오늘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그래서 최장집 교수는 일찍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민주화 이후 질적으로 한국 사회가 나빠졌다고 본다”고 갈파하였다.

한국은 코로나19 방역에서 모범적인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가적 위상과 국민적 자부심이 높아진 게 사실이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세계 최고기록이 너무 많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은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다. 하루 34명, 연간 1만2463명이 자살로 목숨을 잃는다.(2017년 기준) 외환위기 이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였으나, IMF 체제하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로 고용불안이 심화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1983년부터 2000년까지 통계청이 집계한 인구 10만명당 연도별 자살률과 실업률 사이의 상관관계(설명력)를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살률과 실업률은 82.6%의 연관성을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가 코로나19 방역을 잘한 것은 자부할 만하지만, 이것으로 다른 치부까지 다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방역을 모범적으로 잘하고 팬데믹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자살률 세계 1위이고, 세계 유일의 0점대 출산율(2019년 0.92명)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미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말하기가 남우세스럽지 않은가. 더구나 “우리가 따르고 싶었던 나라들이 우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우리가 표준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 더욱 낯부끄러운 일이다. (2020년 5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