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미국 대선과 트럼피즘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11월 3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맞붙은 대선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미국 대선 사상 최초로 두 후보가 7천만 표 넘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고, 투표는 끝났지만 개표가 완료되지 못해 선거가 끝나지 않았으며, 재선에 실패한 현직 대통령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대선 불복 소송에 나섰다.

대다수의 미국 언론은 바이든이 59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고 보도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1월 11일 “우리는 이길 겁니다(WE WILL WIN!).”라고 자신의 트윗 계정에 썼다. 펜스 부통령은 9일 트위터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라며 “우리는 모든 합법적인 투표가 집계될 때까지 계속 싸울 것”이라고 썼다. 폼페이오 국무장관 역시 10일 “앞으로 몇 달 안에 2기 트럼프 행정부로의 순조로운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재선을 주장한 것이다.

부정선거 주장은 트럼프가 이번에 처음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승리한 지난 2016년에도 부정선거를 주장했다. 4년 전에도 트럼프는 개표 직후에 트위터에서 선거부정을 꺼냈다. 선거인단 수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이겨 당선됐지만 득표에서는 약 300만표 뒤졌는데, 트럼프는 선거부정이 없었다면 득표에서도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객관적 근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자신이 승리한 선거에서조차 부정선거를 주장했던 트럼프였으니, 미국 대선 역대 2위의 득표를 하고도 진 선거에 불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도둑질을 멈춰라!” 워싱턴에서 14일 트럼프 지지자 수천명이 참가하는 대선 불복 집회가 열렸다. 트럼프는 이날 워싱턴 집회에 참가하진 않았으나 시위 현장을 지나며 차창 밖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지지자들을 독려했다. 같은 날 300여명의 반트럼프 시위대가 “선거는 끝났다. 결과에 승복하라.”며 맞불 집회에 나서기도 했다. 시위는 밤이 깊어지면서 두 진영 간 유혈충돌로까지 비화했다. 이날 충돌 과정에서 20대 남성이 등에 칼을 맞아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가고, 경찰관 2명을 포함해 양쪽 진영에서 모두 피투성이 부상자가 나왔고, 소속을 알 수 없는 총기 소지자 4명 등 최소 20명이 체포됐다.

미국 대선 결과가 보여주는 바, 지금 미국에서는 진영 논리와 편 가르기가 횡행하면서 ‘두 개의 미국’으로 갈라져 유혈충돌까지 벌어지고 있다. 퓨 리서치 센터가 등록 유권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2016년 선거에서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의 94%가 이번에도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답했고, 지난 선거에서 힐러리를 찍은 사람들의 96%가 이번 선거에서 바이든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로이터>·입소스가 지난달 13~20일 실시한 조사에서, 10명 중 4명은 상대 후보가 이겼을 때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바이든 지지자의 43%, 트럼프 지지자의 41%가 이렇게 답했다.

미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는 위험수위다. 1960년 미 국민을 상대로 “자녀가 상대 정당 지지자와 결혼한다면 기분이 어떨지” 묻는 설문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 4%, 공화당 지지자 5%가 “언짢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50년 뒤인 2010년 같은 설문조사에선 민주당 지지자 33%, 공화당 지지자 49%가 “다소 혹은 상당히 불쾌할 것”이라고 답했다. 4년 전 대선이 있었던 2016년 퓨 리서치 센터 조사에선 공화당 지지자 49%, 민주당 지지자 55%가 상대 정당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지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2018)

지난 8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 미국은 지역과 계급으로 나뉜 두 개의 나라가 됐다”며 “대다수 선진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새로운 글로벌 경제 거점을 형성한 번영하고 진보적인 대도시 지역의 지식노동자와 시골 지역, 쇠락한 산업 도시들의 보수적이고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주민들 사이에 균열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2007~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중산층은 무너졌다. 더구나 코로나19 바이러스까지 확산되어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생존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생명마저 위태롭다. 직장을 잃고 빈곤층으로 전락해 실업수당을 신청하고 무료 급식을 받으려 길게 줄을 서는 서민들의 모습에서 미국 사회의 이면이 드러난다.

바이든 정권이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극단적으로 양분된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크게 승리하지 못했다. 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지켰지만 의석이 10석 정도 줄었다. 민주당은 상원에서도 다수당 지위를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상원은 공화당이 주도하고, 대법원은 보수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바이든 당선자가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이든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려면 불가피하게 공화당의 협력을 구하는 수밖에 없을 터다. 다른 한편에선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는 강력한 반대세력의 저항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극단적인 양극화의 정치지형이 난제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이든의 정책 자체가 새로울 게 없다는 점이다. 바이든 당선자는 코로나19 문제 해결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바이든은 코로나19 사태로 수천만 명이 변변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사각지대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전국민 단일건강보험 제정에 반대하고 민간 의료보험 기업의 수익성 보장을 지지했다. 의료를 영리 목적의 사적 시장에 맡겨 놓은 미국식 의료체계를 수술하지 않고서 대체 무슨 수로 코로나19 감염병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 대통령이 바뀐다고 한들 정책 자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면 기대할 게 없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 6월 AFP통신은 미국에서 코로나19로 62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은 한 70세 남성이 110만달러(약 13억2,330만원)가 넘는 ‘폭탄 청구서’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181쪽 짜리 청구서 내역을 보면 집중치료실 이용료가 하루 9,736달러(약 1,171만원)로 42일 치 40만9천달러(약 4억9,202만원), 하루 사용료가 2,835달러(약 340만원)인 인공호흡기 29일 치 8만2천달러(약 9,864만원)였고, 약값 등이 포함됐다. 다행히 그는 '메디케어' 대상자여서 자비로 이를 부담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병원비를 납세자가 대신 부담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든다고 말했다. 고액의 보험 가입자들이야 걱정할 게 없겠지만, 서민들로선 언감생심 엄두조차 안 나는 끔찍한 의료제도다.

이번 미국 대선은 ‘바이든의 승리’라기보다 ‘트럼프의 패배’라는 분석이 타당하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이 선택된 셈이다. 비록 트럼프가 1990년대 이후 최초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 됐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트럼프는 여전히 공화당의 강력한 지도자이며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지지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번 대선에서 2016년 선거 때보다 약 600만표를 더 받았다. 그가 얻은 7천만표 이상의 득표는 바이든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지지다. 이전까지 최다 득표 기록인 2008년 대선 때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6,946만 표를 뛰어넘는다.

미국 대선의 투표는 끝났으나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다고 해서 트럼프의 시대가 끝난 것도 아니다. 트럼프가 물러나도 트럼피즘(Trumpism·트럼프식 정치)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고 미국 사회를 배회할 것이다. (2020년 11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