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국수주의’에서 드러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체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코로나19 백신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다. 부자 나라들이 다량의 백신을 쓸어 담는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유럽에서는 자국 내에서 생산된 백신의 수출을 통제하는 조치까지 추진되고 있다.

지난 22일(현지시각) 아스트라제네카가 유럽연합(EU)의 백신 공급이 예정보다 지연될 수 있다고 밝히자, 유럽연합 집행위는 “백신 공급이 지연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원인을 조사하겠다.”라고 대응했다. 영국에 본사를 둔 아스트라제네카가 1분기에 유럽연합에 공급하기로 한 백신 물량을 당초 약속한 8000만 회분에서 3100만 회분으로 대폭 줄이겠다고 통보하고, 먼저 계약한 영국에 우선 공급하겠다고 밝힌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유럽연합은 아스트라제네카가 유럽연합보다 영국을 우선시하고 있다고 문제 삼는다. 파스칼 소리오 아스트라제네카 대표가 “영국은 유럽연합보다 석 달 앞서 계약을 체결했다.”라고 해명했으나, 스텔라 키라아키데스 유럽연합 보건담당 집행위원은 “선착순은 동네 정육점에서 통할지 몰라도 우리의 사전구매 계약엔 통하지 않는다.”라고 막무가내였다.

유럽연합은 유럽에서 생산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수출통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만일 백신 제조사가 유럽연합과의 기존 계약을 준수하지 못했을 경우 수출 승인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유럽연합 회원국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25일 백신의 수출통제를 위해 백신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또 물량 부족이 사실인지 확인하겠다며 28일 벨기에의 아스트라제네카 공장에 긴급 출동했다. 29일에는 영국에서 생산된 백신이라도 가져와 공급량을 맞추라고 압박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유럽연합의 백신 수출 제한 조치가 거론되는 데 대해 ‘백신 국수주의’라고 비판했다. 씨엔엔(CNN)은 30일 “세계보건기구와 전문가들이 두려워했던 추악한 백신 국수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평등을 자랑으로 여겨온 유럽에서 시작됐다.”라고 비꼬았다.

미국은 안 그럴까. 미국도 유럽 나라들과 똑같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6일 코로나19 후속 대응책을 발표하며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을 각각 1억 회분씩 모두 2억 회분을 추가 주문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늦여름·초가을까지 미국인 3억명(전체 인구 약 3억2000만명)이 백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건 전시(Wartime)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국이 확보한 백신은 4억 회분에서 6억 회분으로 늘었다.

미국 듀크대 글로벌보건혁신센터는 백신 제조와 공급에 대해 공개된 데이터를 집계 분석해 매주 업데이트하고 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70억 회분이 구매됐고, 57억 회분은 구매 추진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센터의 통계를 보면, 캐나다는 인구 대비 500%인 3억4200만 회분의 백신을, 영국은 인구의 3배 물량인 3억5700만 회분을 확보한 상태다. 인구 대비 2배 이상의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한 나라는 뉴질랜드, 호주, 칠레, 유럽연합, 미국 등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9월 세계 정상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위한 연대를 강조했고 백신이 개발되면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먼저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백신이 개발되자 연대는 깨졌다. 강대국들의 백신 확보 경쟁은 ‘백신 국수주의’라는 민낯을 드러냈고, 마치 국가 간 국력 경쟁의 장처럼 국제사회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어버렸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부유한 국가들이 코로나19 백신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반면에 가난한 나라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백신 보급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지난 18일 세계보건기구 이사회 연설에서 “일부 국가와 제조사들의 ‘나 먼저(Me-First) 접근법’에 전 세계가 파국적인 도덕적 실패를 눈앞에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세계보건기구 화상 브리핑에서 “일부 국가에만 백신이 집중되면 세계는 경제적 실패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올해 여름이 지나고 선진국만 백신 접종을 완료하고 후진국 대부분이 백신을 보급받지 못할 경우 세계 경제 손실액은 9조달러(약 9940조원)를 넘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세계적 감염병을 극복하려면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코로나19는 팬데믹이라 일부 국가만 접종을 끝낸다고 종식되지 않는다. 팬데믹은 말 그대로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인류 전체의 문제다. 일부 나라에서 백신을 접종한다고 해도 접종이 이뤄지지 않은 다른 나라에 대한 항공기 운항을 막는 등의 기존 조치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완전히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함께 안전해지는 것이다. 집단면역은 일국 차원에서 형성할 수 없기에 ‘백신 국수주의’는 이기적이고 차별적일 뿐만 아니라 효과적이지도 않다.

백신 국수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선의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백신을 공평하게 배분하기 위해 추진된 프로젝트가 2020년 6월 11일 공식 출범한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 COVID-19 Vaccine Global Access Facility)다. 세계보건기구,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전염병대비혁신연합(이하 CEPI)이 주도하여 코로나19 백신을 공동으로 구매하고 공동으로 공급하자는 취지의 국제 프로젝트이다.

코백스 퍼실리티는 백신 국수주의에 대항하고자 만들어진 플랫폼이다. 코백스 퍼실리티는 일부 부자 나라나 소수 강대국에게만 백신이 편중되는 현상을 막고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공평하게 골고루 백신을 나눔으로써 백신이 공공재로 기능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2021년 1월 22일 현재 미국을 비롯해 예외적인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전 세계 190개 국이 코백스 퍼실리티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도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전체 인구의 20% 분량인 1000만명 분의 백신을 공급받을 예정이다.

하지만 코백스 퍼실리티 프로젝트는 무기력해지고 있다. 코백스 퍼실리티는 강제성을 담보하는 기구가 아니다. 미국은 아예 이 플랫폼에 불참하고 있다. 영국이나 유럽연합 소속 나라들도 한편으로는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백신의 공동구매를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각각 경쟁적으로 제약회사들과 개별 구매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각국의 개별적인 백신 확보 경쟁이 뜨거워질수록 코백스 퍼실리티는 코로나19 백신의 물량과 가격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백신 국수주의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자국의 안위만을 앞세우는 국수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면 지금과 같은 백신 사재기를 막을 방법이 없고 초국적 제약기업의 전횡과 횡포에 맞서 대항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

그동안 미국이 주도했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체가 코로나19 팬데믹과 백신 국수주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재난의 위기에 처해서도 일체의 책임을 회피한 채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초국적 자본의 이윤 착취가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체인 것이다.

한국 정부는 백신 확보 경쟁에 더 일찍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고 이젠 이미 뒤떨어졌다면서 코로나 불안을 부추기는 주장이 한때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겉으로는 마치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백신 국수주의에 우리도 빨리 가세해야 한다고 선동하면서 백신 사재기를 부추기는 행위이다.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초국적 제약기업(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의 배를 불려주기 위한 국내 특판 영업인 셈이다. (2021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