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의 부끄러운 자화상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3월 21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다. 1960년 3월 21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샤프빌에서 아파르트헤이트(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 분리 정책으로, 백인 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평화적 집회를 벌이던 중에 경찰의 발포에 의해 69명의 시민들이 학살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기려 1966년 유엔 총회에서 3월 21일을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로 선포한 것이다.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애틀랜타 일대에서 20대 백인 남성의 연쇄 총격으로 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희생자는 여성이 7명으로, 한국계 여성 4명을 포함해 6명이 아시아계 여성이었다. 용의자가 페이스북에 중국에 대한 반감을 담은 글을 남긴 것으로 보아 특정 인종과 여성을 겨냥한 인종차별의 혐오범죄 혐의가 짙다.

그런데 현지 경찰은 초동수사 결과 총격범 용의자가 성 중독 유혹을 제거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며 혐오범죄 가능성을 회피하는 듯한 발언으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뉴욕 타임스>를 포함한 미국 언론들과 AP통신 등 주요 외신들은 18일 애틀랜타 총격범을 수사하는 경찰서의 대변인이 용의자의 범행 동기를 두둔하는 발언을 내놨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게다가 문제의 발언을 한 대변인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인종차별적 표현을 올렸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문이 커졌다. 그는 지난해 3월 코로나19 사태가 번진 직후 인스타그램에 ‘Covid 19 IMPORTED VIRUS FROM CHY-NA’라는 글귀가 새겨진 티셔츠 사진을 게재했다. 이 글귀는 ‘중국에서 수입된 코로나19’라는 의미이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애용하는 문구이다.

지난해 11월 7일 대선 승리 연설에서 조 바이든 당선자는 인종 문제를 미국의 4대 위기 가운데 하나로 꼽았었다. (※자세한 것은 지난해 11월 23일 칼럼 ‘미국의 4대 위기와 한미동맹’ 참조) 주지하듯이 미국 사회의 위기는 잔인한 인종차별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해 미국 경찰이 자행한 인종차별의 폭력은 충격적이었다.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조지 플로이드, 집에서 자다가 경찰의 총을 여섯 발 맞은 브레오나 테일러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항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가 통금령을 내렸지만 시위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뉴욕 타임스>는 2020년 BLM 운동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운동이라고 보도했다.

특정 국가나 특정 인종에 대해 적대감을 퍼뜨리고 혐오감을 부추기면서 낙인과 배제를 조장하는 것은 반인륜적인 혐오범죄이다.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1965년 12월 21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 1969년 1월 4일 발효된 유엔 협약)은 인종주의 전파·인종적 증오 고취·특정 인종에 대한 폭력행동 선동을 금지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협약을 가장 무력하고 무색하게 만드는 나라가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미국 전역에서 BLM 운동을 촉발시켰던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시가 유족들에게 약 306억원을 지급하기로 지난 12일 합의하면서 마무리 중이다. 또 브레오나 테일러의 유족은 작년 9월에 약 141억원의 합의금과 대대적인 경찰개혁을 조건으로 켄터키주 루이빌시와 합의했다. 하지만 테일러의 살해와 관련된 경찰은 모두 불기소 처리됐다. 플로이드의 살해와 관련된 4명의 경찰관은 재판 중이지만 결과는 뻔하다. 가해자에 대한 엄한 처벌과 경찰개혁을 비롯한 제도적 변화 없이 단지 돈으로 때우고 끝내는 식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미국에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번 애틀랜타 참사가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공격이 있었다. 올해 초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84세 태국계 노인이 폭행을 당해 결국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달 초 뉴욕에서는 80대 한국계 여성이 ‘묻지 마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는 일이 있었다.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를 멈추라(Stop AAPI Hate)에 따르면, 2020년 3월 19일부터 10개월 동안 3292건의 폭력 사건이 보고되었다. 전년에 비해 150% 증가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아시아계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혐오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이 중국에 대한 혐오를 부추긴 결과다. 취임 전부터 백인우월주의를 강조하고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중국 바이러스’로 부르며 혐오와 적대를 부추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표적 정치인이고, 이에 부화뇌동한 언론도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나팔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국에서도 일부 친미 정치인과 언론들이 그걸 그대로 추종해 중국 혐오를 부추기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다를까? 한국에는 이주노동자·결혼이주민·동포·유학생 등 200만명이 넘는 이주민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이주민 집단인 중국인들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코로나19 감염이 국내에서 확산되던 초기에 중국 공포증의 조장·유포 양상이 심각했었다. ‘짱깨’, ‘중국인은 바이러스’ 등 자극적인 중국인 혐오 표현이 넘쳤고, ‘중국인 출입 금지’를 내건 가게가 등장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중국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었고, 구태 정치인과 못된 종교인들은 ‘중국인 입국 금지’를 외치면서 증오를 조장하기 바빴다.

지난 17일 서울시가 외국인노동자들에게만 코로나19 진단검사를 강제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서울시는 외국인노동자 고용주와 미등록 포함 외국인노동자 전체에게 오는 31일까지 코로나19 검사를 반드시 받으라고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코로나19 감염 발생 시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외국인노동자 전체를 잠재적인 감염자로 보고 관리·통제하려는 발상이다. 집단감염이 훨씬 더 빈번하게 일어났던 종교단체와 비교해봐도 명백한 이중잣대이고 심각한 차별이다.

경기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지 않으면 취업을 할 수 없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추진했다가 논란이 일고 비판이 거세지자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 전국 50여개 이주인권단체는 18일 “외국인은 입국 후 자가격리 기간을 거친 후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사회활동을 하기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았다면 국내에서 감염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그럼에도 검사 대상을 외국인으로 한정해 채용 전 진단검사를 강제하는 것은 낙인찍기라는 부작용만 야기할 뿐”이라고 성토했다.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 행위로 국제적인 망신감이다.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에 돌아보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2021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