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맹세와 조공 상납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4주년 연설은 자화자찬 일색이었다. 아마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조차도 듣기 민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지자들 외에는 특별히 관심이 없었던지 기자회견에 대한 반응 자체가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지지율이 바닥이고 민심이 싸늘한데도 흠결투성이 장관들의 임명을 강행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터에 무엇을 더 바라고 기대할 게 있겠는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장관 후보자 청문회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 “인사청문회가 능력 부분은 그냥 제쳐두고 오로지 흠결만 놓고 따지는 청문회가 되고 있다”면서 “야당에서 반대한다고 해서 저는 검증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부적격 인사를 추천한 데 대해 사과는커녕 되레 적반하장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병역기피 △세금 탈루 △불법적 재산 증식 △위장전입 △연구 부정행위 △음주운전 △성범죄 등 고위공직 후보자 인사검증 7대 기준을 제시한 건 문재인 정부였다. 청와대는 2017년 11월, 위 7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하는 경우에는 임용을 원천 배제하며, 이 기준에 미달하더라도 각각의 비리와 관련하여 고의성, 상습성, 중대성 등이 있는 경우에는 임용을 배제한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다. 한두 가지도 아니고, 아파트 다운계약, 위장전입, 가족동반 외유성 출장, 논문 표절 등 온갖 비리투성이 장관 후보자를 발탁한 청와대가 잘못한 건가, 아니면 부적격하다고 거부감을 표시한 주권자가 잘못한 건가?

‘빚 내서 집 사라’는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베끼더니, 이제는 ‘인사청문회에 대해서도 박근혜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박근혜는 걸핏하면 인사청문회에 대해 ‘신상털기’와 ‘여론재판’이라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수첩 인사’로 인사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자신의 인사 실패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인사청문회를 탓하면서 면피하기에 급급했었다.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주 칼럼에서 썼고, 오늘 다루려고 하는 건 대미 정책에 대해서다. 오는 21일 문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10일 취임 4주년 연설에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5월 하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동맹을 굳건히 다지는 한편, 대북 정책을 더욱 긴밀히 조율하여 남과 북, 미국과 북한 사이의 대화를 복원하고 평화협력의 발걸음을 다시 내딛기 위한 길을 찾겠습니다.”

우선, 한미 정상회담이 한미동맹을 굳건히 다지는 자리로 되어선 안 된다. 한미동맹이란 게 말이 좋아 ‘동맹’이지, 그게 어디 동맹인가? 말은 바로 하자. 한미동맹은 동맹이 아니라 ‘예속’이다. 한미동맹을 굳건히 다진다는 것은 곧 주종(主從, 주인과 부하)의 관계를 굳건히 다진다는 뜻이다. 더구나 새 상전이 들어섰으니 주종의 관계를 굳건히 다지려면, 상전에게 충성을 확약하고 조공을 상납해야만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4일 소성리 사드 기지에 공사 자재가 반입되면서 경찰과 주민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지난달 28일 20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폭력적인 강제 진압으로 주민들을 끌어내고 이동형 발전기와 공사 자재를 반입한 지 20일도 채 지나지 않은 참이다. 정부는 이번 주부터 기지 안정화, 육로 수송로 확보를 위해 경찰을 수시로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참외 수확으로 한창 정신없이 바쁜 철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드철회평화회의’ 소속 단체들은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한미 간 만남이 있을 때마다 소성리를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제물로 삼아 왔다.”고 비판한다. 이번에도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상전의 신임을 얻기 위한 충성 맹세인가?

21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 재벌들이 미국 현지 투자 계획을 발표하거나 검토 중이다. 재계에 따르면 삼성·현대차·SK·LG 등 국내 4대 그룹이 미국 투자를 결정했거나 검토 중인 액수는 무려 40조원에 이른다. 삼성전자는 170억달러(19조원)를 투자해 텍사스주 오스틴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증설을 검토 중이다. 현대자동차는 2025년까지 미국에 전기차 생산설비와 자율주행 등에 총 74억달러(8조원)를 투자하겠다고 지난 13일 발표했다. SK이노베이션은 현재 3조원을 들여 미국 조지아주에 배터리 1·2공장을 건설·가동 중인데, 향후 3조원 규모의 3·4공장 건설을 검토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달 GM과 미국 오하이오주에 총 2조7000억원(LG 투자금 1조원)의 전기차 배터리 합작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2025년까지 미국 내 2곳에 5조원 이상의 공장 신설을 검토 중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의 미국 현지 투자 요구에 대해 한국의 재벌들이 화답하는 모양새다. 현대판 조공 상납의 행렬인가?

다음으로,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대북 정책을 더욱 긴밀히 조율한다는데, 그건 안 될 말이다. 말이 좋아 ‘조율’이지, 그게 어디 조율인가? 말은 바로 하자. 한미 간의 조율이 아니라 미국의 ‘승인’이다. ‘승인’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직접 한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10월 백악관에서 ‘한국 정부가 (대북) 제재 해제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있다’는 질의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approval)’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해당 발언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워싱턴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퉁명스러운 언급’이라고 보도했다.

대북 정책에 관한 한 한미 간의 조율이란 양국 간의 대등한 ‘협의’가 아니라 미국의 일방적 ‘승인’이다. 트럼프의 발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동맹’으로 치장된 한미관계는 주권국가 간의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아니다. ‘승인’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에서 남과 북은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나가기로” 합의했고, 문 대통령은 그해 8·15 광복절 축사를 통해 “철도, 도로 연결은 올해 안에 착공식을 갖는 것이 목표”이며 “철도와 도로의 연결은 한반도 공동번영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의 ‘승인’이 없어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한미 워킹그룹’은 2018년 11월 한국과 미국 정부가 남북관계와 남북 협력, 그리고 그에 따른 대북 제재 관련 사안을 ‘조율’하기 위해 만든 협의체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 개별 관광 구상을 언급하자,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북한과의 어떤 계획도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진행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오죽했으면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워킹그룹이 주야장천 남북관계에 대해서 된다, 안 된다는 얘기만 한다. 그러니 신 조선총독부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라고 일갈했겠는가?

이제껏 당해온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데,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대북 정책에 관해 미국과 얼마나 ‘더욱 긴밀히’ 조율을 한단 말인가? 답답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노예근성이 골수에 사무치지 않고선 이런 발언이 나올 수 없을 터다. 앞으로는 미국의 ‘사전 승인’ 없이는 아예 대북 정책에 대해 입도 뻥긋 안 하겠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북한의 호응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 소린지,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고 하는 소린지…. 어이없고 개탄스럽다. 남은 임기 1년이 걱정스럽다. 이래서야 정권 재창출이나 가능하겠는지, 몹시 우려스럽다. (2021년 5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