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체제 해체의 법칙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한반도에서 전쟁의 총성이 멎었다. 정전(停戰)은 ‘교전 쌍방 간에 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뜻한다. 종전을 합의하기 전에 군대끼리 전쟁을 잠시 멈추는 협정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12월 15일, 독일과 영국 군인들은 ‘크리스마스 정전’을 맺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자 다시 전쟁이 재개됐다.

그런데 한반도는 어떤가. 3년의 전쟁 끝에 68년간의 정전이라는 기묘하고 이상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세계 역사상으로나 국제관례상으로도 정전협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계속되는 경우는 한국전쟁이 유일무이하다.

정전협정 제4조 60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개월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쟁의 종전을 논의했으나 결렬되었고, 이 한 차례의 회담 뒤로 종전 협상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한반도는 전쟁의 종전 없이 68년 동안 정전 상태에 멈춰 서있다.

정전은 전투를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일 뿐 국제법상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 정전협정으로 포성은 멈췄으되 전쟁의 종전이 아니므로,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14일 “이제 미국의 가장 긴 전쟁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며 아프간에서의 미군 철수 방침을 밝혔다. 2001년 9.11 테러를 겪으면서 아프간에 숨어있는 오사마 빈 라덴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지 20년 만의 철군이다. 하지만 ‘미국의 가장 긴 전쟁’은 아프간 전쟁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다.

정전 상태의 결말은 둘 가운데 하나다. 다시 전쟁이 재연되거나, 아니면 전쟁이 끝나고 평화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68년 전 체결된 정전협정은 이미 본연의 기능이 상실된 지 오래됐다. 정전협정의 시스템인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가 붕괴된 지 오래됐으며, 한국 사회에서는 정전협정의 준수와 위반 여부에 대해 아무 관심조차 없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2017년 11월 29일, 북측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시험 발사에 성공한 직후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북측은 성명에서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5형 무기체계는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로케트”라고 발표했다. 북측은 일본 등을 타격권으로 하는 노동미사일(사거리 1200㎞), 괌 등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미사일(IRBM) 화성-12형(사거리 3300~4500㎞),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급 화성-15형(사거리 1만3천㎞)을 모두 갖추고 있다.

지난 23일 <미국의소리>(VOA)는 한스 크리스텐슨 미국과학자연맹 핵정보프로젝트 국장의 보고서를 인용해 “지난 10년 동안 북한이 모든 사거리를 망라한 매우 다양한 종류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크리스텐슨 국장은 <핵과학자회보> 7월호에 실린 ‘북한 핵무기’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북한이 2006년부터 2017년까지 6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이래 “다양한 폭발력을 갖춘 탄두에 적합한 강력한 핵폭발 기기들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의심이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북한이 앞으로 매년 최대 6개의 핵탄두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을 추가해 2030년까지는 80~90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양을 확보할 것으로 내다봤다.

핵무기의 위협에 맞서는 유일한 방어책은 무엇일까. ‘상호확증파괴(相互確證破壞, MAD)’에 의한 ‘공포의 균형’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상호확증파괴는 핵 억지 전략의 문법이다. 핵무기를 보유한 적대 국가들 사이에 어느 한쪽이 상대방으로부터 선제 핵공격을 받아도 핵전력을 보존해 보복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경우, 핵무기의 선제적 사용이 쌍방 모두를 파괴하는 공멸의 상황이 되므로 이 나라들 사이에서는 핵전쟁이 벌어질 수 없다는 법칙이다.

북측이 핵무장을 완성함으로써 한반도에서는 핵 억지력의 문법이 작동하게 되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북의 핵무장에 대한 찬반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핵과학자회보>의 보고서에서 확인되듯이, 한반도에서 핵 억지력의 문법이 작동하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핵 억지력의 문법이 작동하게 되면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바뀐다.

이로써 정전협정은 사실상 사문화되었으며,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전쟁 상태는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전협정의 두 당사국인 북측과 미국이 북(조선)의 건국 이래 최초로 2018년 6월 12일에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조·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게 된 배경이다. 조·미 두 나라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합의를 밝혔다.

정전체제의 끝이 보인다고 하여 전쟁 상태가 종식되고 평화체제로 이행하는 길이 결코 순탄한 건 아니다. 그 길에는 외풍과 역풍도 있을 수 있고 좌절과 시련도 있을 수 있다. 불안 요소와 암초가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전쟁중독 국가’ 미국은 평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국은 어떻게든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 위기를 조장하여 무기를 팔아먹어야 하는 나라다.

그러므로 평화로 가는 여정은 숱한 고비와 위기의 순간에 직면할 수 있다.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고 교착 상태가 지루하게 반복되면서 진척이 더딜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급한 기대와 감상적 낙관은 금물이다.

정전협정이 68년간이나 존속했다는 것 자체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기이한 일이고 역사적인 적폐이다. 평화로 가는 여정이 멀고 험할지라도 조급하거나 초조할 필요는 없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 향하는 도도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다. 비록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 긴장과 교착, 답보와 진통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68년의 정전체제라는 역사적 적폐가 청산되고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필연의 법칙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철의 장막으로 분리돼 냉전을 전개해온 동서 양대 진영 국가들은 3년간의 협상을 통해 ‘헬싱키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15년간의 이행 과정,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프로세스를 통해 마침내 냉전을 끝내고 파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에서 새로운 평화체제가 수립됐다. 1970년대에 중국과 미국이 관계 정상화로 나아가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중국과 미국이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한 것은 1979년이다. 1972년 최초의 중·미 정상회담에서 정식 수교까지 7년이 걸렸다.

지금은 대화와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우여곡절을 겪고 있지만, 한반도에서 정전체제가 해체되고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법칙이다. 비록 법칙이 관철되는 과정에서 곡절이 있을 수 있고 진행 속도에서 기대에 어긋날 순 있겠으나, 법칙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다. 거듭 강조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근원을 완전히 제거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길은 험난한 노정이지만, 평화체제로 이행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다. (2021년 7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