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프간 전쟁 참패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15일 수도 카불에 진입했다. AFP통신은 아프가니스탄 내무부가 “탈레반에 권력을 평화롭게 넘기겠다”고 밝히면서 사실상 백기 투항을 선언했다고 전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직후 국외로 도피했다.

이날 서방 국가들은 자국민 철수작전에 들어갔고,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는 국외로 탈출하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1975년 베트남 패망을 떠올리게 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카불의 대사관 인력 철수작전에 나섰다. 미 공영방송 NPR은 탈레반이 카불을 포위하자 미군이 헬리콥터를 이용해 자국 대사관에서 외교관들을 실어나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1975년 사이공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헬기에 매달려 탈출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지난달 2일 한밤중에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미군이 갑자기 철수했다. 사실상 야반도주였다. 미군은 바그람 기지에 각종 물품 350만 개를 비롯하여 차량과 장갑차까지 버리고 급히 떠났다.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북쪽으로 45㎞ 떨어진 바그람 기지는 아프간 주둔 미군 최대 군사 기지로, 미국이 벌인 아프간 전쟁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바그람 기지엔 미군과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군이 대규모로 주둔해 있었다. 미군의 바그람 기지 철수는 20년을 끌어온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의 패배를 상징한다.

2001년 9·11 테러 뒤 미국이 개시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미군 철수와 친미 정부의 항복, 탈레반의 복귀로 막을 내리게 됐다. 2001년 시작된 아프간 전쟁은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으로, ‘영원한 전쟁’으로 불린다. 아버지 세대가 시작한 전쟁을 아들 세대에서도 수행해 ‘세대의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프간 전쟁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1년 뉴욕 무역센터 등에 대한 9·11 테러 직후인 10월 시작됐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의 배후로 지목하고 아프간의 탈레반에 그의 미국 인도를 요구했다. 하지만 탈레반이 거부했고, 미국은 곧바로 아프간을 침공했다.

전쟁 초기는 일방적인 미국의 승리였다. 탈레반 정부는 개전 한 달 만에 수도 카불에서 철수했고, 두 달 만에 탈레반의 근거지인 칸다하르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아프간 전쟁은 장기전으로 빠져들었다. 탈레반이 지지세력을 규합해 2003년부터 반미 투쟁을 본격화했으며, 미국이 탈레반 대신 내세웠던 친미 카르자이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탈레반 지지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장기전에 따른 전쟁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치솟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은 미국 정부의 재정을 압박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동시 전쟁을 치르면서 부채로 조달한 전쟁비용은 2조달러(약 2천338조원)가 넘는다. 오는 2050년까지 예상 이자 비용만 최대 6조5천억달러(약 7천598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 중 아프간에 투입된 비용이 1조 달러라고 밝혔다.

2020년 2월 29일 미국과 탈레반이 카타르 도하에서 평화협정을 타결했다. 미군 등 외국군을 아프간에서 14개월 이내로 완전 철군하고, 탈레반은 아프간을 알카에다 등의 기지로 활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미군의 철수 일정이 지켜지지 않았고, 탈레반이 공세를 강화하면서 미국은 궁지에 몰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8월 31일까지 미군 철군을 완료하겠다고 발표했으나, 탈레반은 미군의 철수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수도 카불에 입성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전 철수 결정 이유로 빈 라덴 제거와 알카에다 궤멸이라는 애초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20년간 1조 달러를 퍼부은 최장기 전쟁에서 결국 미국이 탈레반에게 정권을 다시 내준 채 물러나게 됐다. 변명의 여지 없는 치욕적인 참패이다.

CNN방송에 따르면 미국은 카불 대사관의 모든 요원을 오는 17일까지 대피시킬 계획이다. 당초 대사를 비롯한 최고위급 인사와 경호요원 등 최소한의 인력만큼은 남겨두기로 했지만, 상황이 악화하자 전원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아프간에서 미 대사관의 철수는 1975년 베트남전 때 미국의 사이공 탈출작전에 빗대 ‘바이든표 사이공’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 직전 4월 29일부터 이틀간 펼쳐진 탈출작전을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이라고 함. 당시 북베트남군의 포격이 미군이 주둔한 사이공 떤셔넛 공군기지까지 닿자 미국은 비행기 탈출을 중단하고 헬기를 운항해 미국인 등 민간인을 남중국해에 있던 함정들에 실어날랐고, 이 작전으로 사이공이 북베트남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함.)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5만80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고 1000억 달러(현 시세로 환산하면 약 1조 달러)의 자금을 쏟아부었음에도 참패했다. 베트남전 패배는 2차 대전 이후 부상한 미국의 패권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베트남전 패배 이후 수십 년간 미국은 재정 적자와 국론 분열로 쇠퇴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프간 전쟁의 패배 역시 미국의 영향력을 실추시키고 국론 분열을 부추기는 계기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

미국은 전쟁 국가이다. 미국은 세계를 제패하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에 매달려왔다. 미국은 전 세계를 자신의 작전 구역으로 삼고 있다. 북부사령부(북미), 남부사령부(중남미), 인도태평양사령부(동아시아), 유럽사령부(유럽), 중부사령부(중동 및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사령부(아프리카)가 있다. 이들 6대 지역 사령부 외에 핵무기를 관장하는 전략사령부, 우주를 관할하는 우주사령부, 사이버공간에서 작전하는 사이버사령부까지 있다. 그야말로 지구라는 행성 전체와 심지어 우주까지 미군의 작전 구역이다.

미국은 80개 국가 약 800개의 해외 미군기지에 15만 명의 미군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을 ‘천조국’(1000조원의 국방비를 쓰는 나라)이라고 부른다. ‘지구 방위군’ 역할을 맡은 미국을 비꼬는 말이다. 여기에 핵무기 통계는 잡히지도 않는다. 핵무기는 국방부 관할이 아니라 에너지부 관할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이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나라는 없었다.

800개가 넘는 해외 군사 기지를 유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 미국이 처한 객관적 현실이다. 무너지는 제국을 유지하기 힘겨운 처지이므로 미국으로선 단계적 감축과 철수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자국의 안위를 돌보아야 할 형편인데, 동맹국의 안보를 신경 쓸 여유가 있겠는가. 지난 트럼프 행정부가 고립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아프간 철군을 결정하게 된 배경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베트남전 패전 직전 최후의 탈출 작전이 재현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1975년 사이공에서 쫓겨나듯 베트남을 탈출했던 미국의 모습이 아프간에서 되풀이될 경우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위신이 추락하고 영향력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해서다. 하지만 미국 정계에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아프간 상황은 1975년 사이공에서의 굴욕적인 패배보다 더 최악인 속편”이라면서 “9·11 테러 20주년에 탈레반이 카불의 미국 대사관을 불태우며 축하하는 최악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와 그에 따른 미국의 위신 추락이 아니다.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은 아프간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하여 희생된 미군 병사와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아프가니스탄 국민이 피를 흘리고 국토가 처참하게 파괴되었는가. (2007년 7월, 한국의 기독교 단기선교단 23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돼 2명이 숨지고 나머지는 43일 억류됐다가 풀려남.) 미국은 자신들의 위신 추락을 걱정하기에 앞서 잘못된 전쟁의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반성부터 해야 마땅하다. (2021년 8월 16일)